컨디션 조절을 위해 일찍 들어간다던 윤하의 얼굴이 어제보다 더 까칠해진 것을 보며, 태균은 남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도 자신의 전화가 그녀에게 큰 심경 변화를 준 것이 틀림없었다.'사실, 어제 그녀에게 무작정 술기운을 빌어 전화 한 것을 후회했다. 멀쩡한 정신으로 이야기를 해도 믿을까 말까한데 술에 취해 전화를 했으니 어쩌면 그녀가 불쾌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불안했다.'잠깐의 휴식시간. 촬영장 한쪽에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는 그녀에게로 다가가며 태균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서구적인 마스크라 눈에 띄는 미인이지만 저렇게 뭔가 골몰하고 있는 모습은 귀여운 말괄량이같은 느낌을 주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이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그녀는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주는 존재였던 것이다.'“뭘 그렇게 혼자 고민합니까?”'갑작스러운 등장에 깜짝 놀라는 윤하의 모습에 애써 웃음을 참는 태균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윤하는 입을 쭉 내밀고는 팔 다리를 쭈욱 펴며 기지개를 켰다.'“그냥 이런 저런 생각이요.”'촬영장에 도착 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평소와 똑같은 모습으로 자신을 대하는 그를 보며, 윤하는 그저 그가 술에 취해 한 실언이려니 하고 넘어가려던 참이었다. '“장윤하 씨, 생각은 좀 해봤습니까?”'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팬들에게 화답을 하고, 촬영 준비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살피던 윤하의 행동이 우뚝 멈췄다.'보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동요해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면 또 스캔들이 터져서 힘든 상황이 올지 모르는데 윤하는 걱정을 하면서도 아무런 대응도 못하고 코 앞까지 다가와 있는 그를 올려다봤다.'“시간이 필요한 질문이었나요?”'“진심이었어요?”'“내가 그렇게 실없는 놈으로 보였습니까?”'“아, 아니에요. 그런 뜻은……. 하지만 그 이후로 다시 전화도 없으셨고, 또…… 오늘도 별 말이 없으셨고…… 그래서 또…….”'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으며 대화를 하면서도 윤하는 심장이 쿵쿵 울려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보는 이가 너무 많았고, 혹시라도 누군가가 대화를 엿들을까봐 겁이 났다.'“겁나요?”'어물거리던 윤하는 태균의 한마디에 성질이 불같이 화르르 솟구쳐 한껏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노려봤다.'“뭐라구요?”'“사람들의 시선이, 소문이 겁나서 머뭇거리냐고 묻는 겁니다.”'“하! 천하의 장윤하가 소문을 두려워 할 것 같아요? 천만의 말씀! 절대 아니거든요?”'“그럼, 결정 났네요. 오늘부터 우리 사귀는 겁니다.”'“네? 아니, 저…….”'“잘해봅시다.”'그의 기습공격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한 윤하가 어물거리는 사이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인 태균은 그녀를 격려라도 해주는 듯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주고는 그녀를 지나쳐 갔다.'“하, 뭐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허를 찔려 버린 듯 황당한 생각이 들면서도 그녀는 자꾸만 비어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아야만 했다. 그녀에게 새롭게 찾아온 사랑이 두렵기보다는 왠지 든든했다.'그리고 지금까지와의 만남과는 다를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윤하는 도리질을 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아무리 좋아도 은근슬쩍 넘어갈 수는 없는 문제였다.'사람을 깎아내리지 못해서 안달이더니 왜 갑자기 마음이 변한 것일까. 그 이유가 알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의 어디가 좋은지도 듣고 싶었다. 그에게서 들을 대답이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아닐지라도 적어도 자신의 겉껍데기에 대한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았다.'그라면, 그는 자신의 내면을 알아봐주길 바랬다.''첫 방송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물론, 늘 그렇듯이 그녀에 대한 악플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그녀에 연기력에 대한 호평이었고, 모처럼 댓글을 대하는 윤하의 태도에 여유가 생겼다. 인터뷰는 더욱 쇄도했고, 촬영장은 첫 방송부터 쾌거를 이룬 부메랑의 주인공과 감독을 취재하기 위한 열기로 뜨거웠다.'“이야~ 대단한데……. 오 감독. 한 턱 내야겠어. 또 한 건 올린건가?”'“이제 시작인데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죠.”'우 감독의 농담에 태균도 시청률이 만족스러운지 슬쩍 농담을 던졌다. 그러자 태균을 바라보는 우 감독의 눈이 가늘어졌다.'“왜요?”'“이거, 이거 뭔가 분위기가 좀 다른데?”'“뭐, 무슨 분위기 말입니까?”'괜히 찔려 당황한 태균은 얼굴을 들이미는 그를 피해 살짝 몸을 뒤로 뺐다. 우 감독의 입가에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원래 우리 오 감독이 이렇게 말랑한 사람이었나 해서 말이지.”'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한 연륜있는 선배의 농담에 태균은 헛기침만 몇 번 할뿐 대답을 회피했다. 더 이상 놀려봤자 자신이 듣고 싶은 답이 나올리 없으니 우 감독은 오늘은 일단 여기서 멈추기로 했다. 분명 심경에 변화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늘 찬바람이 쌩쌩 불던 그의 주변에 훈풍이라도 부는지 평소와는 다른 느낌을 주고 있었다.'그때, 취재 기자들이 만든 인간 울타리를 뚫고 윤하가 모습을 드러내자 그의 얼굴에 피어오르는 환한 기운에 우 감독은 숨죽여 웃어야 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어후! 오늘 정말 굉장한데요?”'상기 된 얼굴로 촬영장에 들어선 윤하는 슬쩍 태균의 위치를 확인했다. 어제 밤새 생각을 하고 또 한 결과를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선 그와의 대화가 필요했다.'“윤하 씨, 오늘 컨디션 기가 막히네. 새벽까지 화보 촬영했다면서 안 피곤한가봐.”'“어머, 우 감독님. 바쁜 것도 복이에요. 장윤하 인생에 이만큼 바빠 본 적이 언제라고 배부른 소리하겠어요. 제가 더 잘 되서 성공하면 저 예쁘게 찍어 주신 감독님 은혜 절대로 잊지 않을게요.”'우 감독과 가벼운 농담을 나눈 윤하는 태균과는 가벼운 눈인사를 나누고, 촬영 준비를 위해 준비를 서둘렀다. 카메라와 마주한 윤하는 새삼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이 뛰는 것을 느끼며, 심호흡을 했다. 평소와는 다름없이 건조한 시선으로 자신을 찌를 듯이 바라보는 태균의 시선이 새삼 뜨겁게 느껴졌다. 화끈거리는 뺨이 혹시 다른 사람들도 눈치 챌까 걱정스러웠다.'“선배, 아직 몸이 안 좋으신 거 아니에요?”'아니나 다를까 눈치 빠르게 연하가 다가와 그녀를 걱정스레 바라봤다. 평소에도 알뜰히 챙겨주는 그였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그의 행동이 거슬렸다. '못마땅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태균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아니야. 생각보다 1, 2회 반응이 좋으니까. 괜히 더 긴장되고 그러네.”'“에이, 선배답지 않게 왜 긴장하고 그러세요. 저까지 긴장되게. 아 맞다! 엊그제 파티에 못가서 죄송해요. 선배는 오셨다면서요?”'“응. 잠깐…….”'윤하는 연하와 대화를 나누며 슬쩍 그가 있는 쪽을 살폈다. 우 감독과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 안도하며 흐트러지는 자신의 마음을 추슬렀다. 촬영에 지장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프로정신이 투철한 그녀로써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첫 방송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윤하의 연기력과 잘생긴 신인 남자배우의 등장, 그리고 특유의 세련된 촬영기법으로 맑고 투명한 느낌을 주는 듯한 그의 연출력까지 합세해 언제나 그녀에게 등을 돌렸던 누리꾼들도 이번에는 우호적인 반응이었다. '물론, 그녀를 죽어라 미워하는 누리꾼들도 여전히 존재했지만 말이다.'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자신을 미워하는 누리꾼들의 댓글에는 여전히 무덤덤했고, 자신에게 우호적인 댓글들에는 불끈 힘이 솟았다. '‘그래, 이제 시작인데 벌써부터 들떠서 마음 흐트러트리면 안 되지. 정신차리자!’'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윤하의 시선이 자연스레 태균에게로 향했다. 우 감독과 대화를 마친 태균의 시선 역시 그녀에게로 향해 있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멈춰 버린 듯, 지금 이 공간에 둘만이 존재하는 듯 서로에게 빨려 들어가는 기분에 사로잡혔다.'그 덕분에 이 자리에 서 있고, 그 덕분에 세상 사람들에게 늘 받았던 경멸과 규탄이 아닌 호의적이고 따뜻한 시선을 얻을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윤하는 콧날이 시큰해졌다.'무뚝뚝한 그의 고백이 오히려 담백하고 진솔하게 느껴졌다면 그는 믿을까? 세나는 그를 향해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고마워요. 날 선택해줘서, 날 세상으로 이끌어줘서…….’'두 사람의 시선은 그 후로도 한참동안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틈에서도 떨어질 줄 몰랐다.''태균은 요즘 입술이 바짝바짝 타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우격다짐과도 같았던 고백 이후로 그녀와 좀처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어 아직 확실한 대답을 듣지 못한 상태였다.'꼭 말이 아니어도 가끔씩 스치듯 마주치는 시선 속에서 어렴풋이 그녀 역시 자신과 같은 마음이란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녀의 입으로 확실한 답을 듣고 싶었다.'하지만 도무지 단둘이 차분하게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다. 어느덧 2주나 흘러 있었고, 드라마의 인기몰이로 촬영장 주변에는 그녀를 인터뷰 하려는 취재진이 진을 치고 있었고, 그것이 아니면 그녀의 사무실 식구들이나 다른 배우들이 성격 좋은 그녀의 곁을 떠나질 않고 있었다.'‘미치겠군.’'태균은 작은 욕설을 내뱉으며 여전히 모 방송국의 취재진에게 휩싸여 있는 그녀의 뒷모습을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설상가상으로 촬영분이 많아지면서 팀을 나누어 촬영에 들어가게 되어 내일부터 이틀간은 그녀와 생이별을 해야 할 판이었다.'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언젠가 폭주를 하게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이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생글생글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하지만 사실 미칠 것 같은 것은 윤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확실히 듣고, 또 하고 싶은 말들이 있는데 아주 작은 일말의 시간적 여유조차 그녀에게는 주어지지 않고 있었다. 무슨 인터뷰 스케줄은 이리도 많은지 자연스레 은수를 바라보는 시선이 날카로워졌다.'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그녀가 피로가 누적되어 신경이 예민해진 것으로만 여긴 은수는 집에서 그녀의 모친이 챙겨주는 보약만 열심히 공수해 먹일 뿐이었다.'그날도 결국 태균과 일정인 대화 외에는 한마디도 나누어보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온 윤하는 오는 동안 애꿎은 은수만 쥐잡듯이 잡았다.'“일도 좋지만 나도 좀 살자! 엉? 나도 사람이거든?”'“미안해요. 누나. 대신 내일은 오후 촬영만 있으니까. 오전 내내 푹 쉬세요. 마 원장님 연락 해 놓을까요? 마사지라도 좀 받으실래요?”'“됐어! 마사지고 나발이고 너 정말 짜증나!”'한바탕 성질을 부리고 벤의 문을 부서져라 닫고 내린 윤하는 대문을 열고 들어가려다 인기척을 느끼고는 재빠르게 눈을 돌려 어두운 골목을 살폈다.'여차하면 고등학교 때 도훈을 따라 취미로 배운 공수도로 상대를 단숨에 제압해 버릴 생각에 자세를 잡는 것도 잊지 않았다.'이미 자신이 타고 온 차도 떠난 후였고, 힘에서 밀리면 동네가 떠나가라 비명이라도 지를 태세였다.'“누구세요?”'애써 두려움을 감춘 당찬 그녀의 외침에 반대쪽 전봇대 어두운 곳에서 그림자 하나가 튀어 나왔다.'“흡!”'상대를 확인한 윤하는 재빠르게 주위를 화인하고는 서둘러 문을 열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잠시 후, 그녀가 의도적으로 열어 놓은 대문 안으로 검은 그림자가 따라 들어섰다.'“여긴, 어쩐 일이세요?”'“이야기는 해야 할 것 같은데 도무지 타이밍이 맞아야 말이죠.”'자신의 행동이 스스로도 뜻밖인지 태균은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문지르며 머쓱함을 없애려 했다. 천하의 오태균이 여자 집 앞에서 숨죽이고 기다리는 날이 올 줄이야 꿈에도 몰랐다.'그의 행동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 윤하는 자꾸만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리느라 입을 꼭 다물어야 했다.'“피곤할텐데 미안해요. 꼭 듣고 싶은 대답이 있어서요.”'촬영에 편집에 피곤하기가 자기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그의 말에 자신에 대한 걱정과 배려가 느껴지자 윤하는 피곤했던 몸이 말랑말랑 노곤해 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저도 아직 더 들어야 할 말이 있어요. 제 대답을 듣기 전에 먼저 대답해 주세요.”'“그러죠.”'“저랑 사귀고 싶다는 거 진심이에요?”'“물론입니다.”'“사람들이 알게 되면 예전에 우리 둘이 났던 스캔들 때보다 더 시끄러울 거예요. 방송국도 뒤집힐 거구요. 감수 할 자신 있어요?”'“그 정도도 생각 못하고 윤하 씨에게 다가갈 만큼 나 무모한 사람 아닙니다.”'단호한 말투, 진중한 눈빛. 어느 것 하나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의 대답을 듣고도 가만히 그의 눈을 들여다 보고 있던 윤하의 입가에 비로소 실금 같은 미소가 지어졌고, 윤하는 척하니 손을 내밀며 말했다.'“시끄러운 소문을 몰고 다니는 골칫덩어리라도 괜찮다면 우리 잘 해 봐요.”'“왜요?”'태균은 그녀가 내민 손과 그녀의 얼굴을 못마땅한 듯 번갈아 바라보기만 할뿐 마주잡질 않았다. 그런 그의 행동이 의아한 윤하가 되묻자 이내 그녀의 손목을 확 잡아끌어 그녀를 품에 안은 태균은 장난스럽게 말했다.'“연인끼리는 이렇게 인사하는 겁니다.”'그의 돌발행동에 심장이 쿵쾅거리고 정신이 혼미해졌지만 그의 넓고 따뜻한 가슴과 그의 가슴에 올려 놓은 손 아래 느껴지는 펄떡이는 심장을 느끼며 윤하는 가만히 손을 돌려 그의 허리를 마주 안았다.'“앞으로 많이 힘들어 질 수도 있지만 장윤하 씨, 우리 잘 해 봅시다.”' '- 5. 우리 연애 할래요?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