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고 싶은 곡이 있나?”'“무엇을 칠 줄 아시는데요?”'나의 물음에 그가 악보꽂이를 향해 고갯짓하며 답했다.'“거기에 있는 것은 전부.”'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악보꽂이에 다가갔다. 눈에 익은 책들이 꽤 있었다. 그중에서 나는 베토벤 소나타 전집을 발견해내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뽑아들고 21번 발트슈타인을 펼쳐서 그에게 건넸다.'“이것을 연주해주세요.”'그는 잠시 악보를 내려다보더니 악보 없이 연주를 시작했다. allegro con brio. 힘차고 빠르게. 그의 손이 망설임 없이 건반 위를 누볐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그의 연주를 지켜보았다. 온몸으로 그가 만들어내는 음의 향연을 느꼈다. 연주를 마지막까지 들었을 때 내 눈가는 젖어 있었다. '나는 와이셔츠 소매로 물기를 훔치고 우 교수를 바라보았다. 연주를 끝낸 그는 인형처럼 피아노 의자에 앉아있었다. 나는 그를 향해 물었다.'“피아노를 배우셨어요?”'“어느 정도는.”'그가 피아노 위에 얹어놓았던 안경을 도로 쓰며 대꾸했다.'“피아노를 좋아하세요?”'“아니.”'나의 물음에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단호한 그의 답에 나는 배반당한 기분이었다. 나는 분명 그가 피아노를 좋아할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이런 수준이 될 때까지 피아노를 배웠단 말인가? 피아노를 좋아했어도 배울 수 없었던 나에게 있어 그의 답은 슬그머니 분노가 치밀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화를 낼 수 없었다. 그는 나의 요청으로 이 시간에 피아노를 쳤다. 나는 에둘러서 반감을 표시했다.'“그런데 왜 피아노를 배우셨어요?”'우 교수는 앞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놓여있어야 할 악보조차 없다. 나는 그의 옆모습을 보았다. 그는 앞을 보고 있지만 그의 눈동자는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의 소녀를 위해서.”'우 교수는 나지막이 말했다. 그러고는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