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이따 애들 데리고 목욕탕에 좀 갔다 와요. 저기 동사무소 사거리 건너 녹수탕이라고 새로 생겼다네. 사람들이 그러는데, 거기 물도 엄청 좋고 개업 기념으로 오늘까지 가면 타월을 준대요, 사람 머리 수 대로 준다니까 애들 데리고 꼭 좀 가요. 그리고 설렁설렁 하지 말고 애들 때 좀, 제발 빡빡 밀어요. 본전은 뽑아야지.”'“그래, 알았어.”'어렸을 적 대중목욕탕을 가는 일은 나와 경식에게 빼놓을 수 없는 월례행사 중 하나였다. 그러나 부식가게 일로 늘 바쁜 엄마에겐 그 월례행사조차 제때 못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때문에 바쁜 엄마를 대신해 이따금 우리는 아버지와 목욕탕에 가곤 했다. 엄마와 목욕탕에 가는 것보다 아버지와 목욕탕에 가는 일이 더 많았던 나에게 남탕에 들어가는 것은 전혀 이상하거나 거북한 일이 아니었다. 마치 당시 내 또래 남자 아이들이 엄마를 따라 여탕에 들어오듯이 말이다.'하지만 우리는 목욕탕 가는 것이 썩 즐겁지만은 않았다. '목욕탕. '하얀 수증기 속의 세상은 언제나 어린 우리에게 숨 막히는 공간이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뚱이인 데도 불구하고 목욕탕의 끊임없이 피어나는 열기는 우리의 숨구멍을 죄고 이따금 질식할 것만 같은 공포를 몰고 오곤 했다. 아니, 어쩌면 정작 무서운 건 까끌까끌한 초록색 이태리타월의 위력인지도 모르겠다. 손마디 굵은 아버지의 손에서 소면가락처럼 한없이 밀려나오던, 표피를 덮고 있던 하얀 껍질. 처음엔 굵고 회색빛이었던 껍질이 점점 가늘고 하얀 가루가 되어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때까지 아버지는 엄마의 말을 충실히 따랐다. 그리고 나는 털갈이를 하는 병아리처럼, 그렇게 내 몸을 콘크리트처럼 감싼 하얀 각질이 벗겨져 나갈 때마다 내가 조금씩 보이지 않게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키 낮은 건물들이 오밀조밀 밀집한 좁다란 골목길을 따라 가다 보면 시장 길이 나오고 대로가 나왔다. 대로변에 즐비하게 늘어선 상가들을 지나 목욕탕이 가까워 오면 으레 그랬듯 아버지는 근처의 슈퍼마켓으로 들어가 야쿠르트와 막대사탕을 사서 우리들 손에 쥐어주시곤 했다. 그나마 목욕탕 가는 길에 유일한 즐거움이 있다면 바로 그것일 테다. 그리고 그것은 먼 훗날 내 가슴에서 두고두고 박하 맛 나는 싸한 그리움이 되었다.'휴일의 목욕탕은 잔칫집처럼 언제나 북적거렸다. 신장개업한 목욕탕의 출입구엔 사철나무가 심어진 대형 화분 몇 개가 가지런히 놓였고, ‘축 발전’이란 글자가 새겨진 화한의 꽃분홍 리본이 손짓하듯 바람에 길게 펄럭였다. 녹수탕이란 글자가 새겨진 커다란 굴뚝에서 뭉게뭉게 치솟아 오르는 허연 연기를 보는 우리의 볼에선 덩달아 하얀 입김이 흘렀다.'“아빠, 때 살살 문질러야 돼.”'열심히 사탕을 빨던 동생 경식이 심각한 얼굴로 아버지께 단단한 다짐을 흘린다. '“원, 녀석도. 오냐.”'카운터에서 셈을 하던 아버지가 빙그레 웃으며 동생의 까만 머리통을 쓰다듬는다. 나는 카운터 앞, 여탕과 남탕으로 분리되는 두 갈래 길에서 아주 짧게 엄마와 여탕으로 들어가는 아이를 보고 섰다. 남탕과 여탕, 아니, 남자와 여자로 분리되는 두 갈래길, 그리고 그 앞에 이렇게 선 나, 현재 일곱 살의 나는 길 잃은 미아다. 남자와 여자가 어떻게 다른지 알지 못하는.'또한 알지 못한다. 아렴풋이 피어나는 목욕탕의 뽀얀 수증기처럼, 앞으로 내가 걷게 될 인생의 길가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또 어떤 남자를 만나게 될지. 마찬가지로 먼 훗날, 보이지 않는 인생이란 길을 어떤 남자와 같이 걸어가게 될지…….'간혹 나처럼 아빠와 남탕을 찾아오는 여자아이도 눈에 띄기는 했다. 그러나 그들 대개는 나보다 어린 나이로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때껏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 적어도 그날, 그 머슴애를 만나기 전까진.'“앗, 차가!”'땟자국이 꼬질꼬질한 바비인형의 몸에 비누를 묻혀가며 동생과 소꿉놀이를 하던 나는 별안간 날아온 찬물세례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발딱 일어섰다. 뭉게뭉게 피어나는 수증기 속에 물총을 손에 든 낯설지 않은 한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어, 박정우.”'동생 경식이 반갑게 불청객의 이름을 불렀다. '박정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