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게 홀릭된 그 무엇 하나, 거짓말.''''첫사랑이자 3년간 짝사랑의 대상이었던 그 사람이 죽었다.''치아를 훤히 드러내고 행복해 죽겠다는 얼굴로 웃고 있는 그의 영정사진을 보고 있자니 이제야 그 사람이 죽었다는 게 실감이 난다. 바로 이틀 전에 통화를 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걸까. 입찬소리하는 게 아니라더니 그냥 행복하다고 할 것이지 말끝마다 행복해 죽겠다는 말은 왜 붙여서 이 사단을 만들었을까 싶어 공연히 화도 난다. 이 와중에 그깟 말꼬리나 잡고 있는 내가 어지간히 한심하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바빠?'“바쁘지, 왜?”'바쁜 일은커녕 약속 하나 없으면서 꼴에 자존심이라도 챙기고 싶었는지 나도 모르게 거짓말이 튀어나왔다.'-아니, 안 바쁘면 내 결혼식에 초대하려고 했지.'그 말에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짝사랑을 끝내긴 했지만 그래도 싹 지운 건 아니기에 금방 아무렇지 않게 축하해,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호들갑스럽더라도 축하한다고 말해 줄 걸 이제 와 후회가 된다.'“왔구나?”'현수 선배가 붉어진 눈시울로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친구를 잃은 슬픔에 그는 벌써 초췌했다.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나는 조문하기 위해 신발을 벗었다. 하지만 한 짝을 다 벗기도 전에 똥 광(光)이 선명하게 그려진 양말이 나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아침에 아무거나 잡히는 대로 신고 나온 양말이 왜 하필이면 똥 광(光)일까. 이건 망할 새언니님인 문탈의 저주다. 예쁘다고 똥, 팔, 삼, 비, 풍, 초를 골고루 사왔을 때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그리고 사왔으면 저나 신을 것이지 왜 남의 서랍에 갖다 놓는 건지 뒤늦게 그녀의 뇌구조가 의심스럽다.'올라오지 않고 뭐하냐는 현수 선배의 눈치에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다 내 양말만 쳐다보는 것 같아서 제대로 슬퍼하지도 못했다. 오랫동안 짝사랑했던 사람을 보내면서 나는 진정 목 놓아 울 자격도 없다는 말인가. 하긴 양말이 아니더라도 난 여기서 서럽게 울면 안 되는 처지긴 하다. 그저 아는 후배일 뿐인 내가 통곡하듯 울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게 빤하다. 아마 그 사람도 그럴 거다. 그 사람에게조차 내비치지 않았던 지독할 정도로 철저한 짝사랑이었으니까. '실신한 그의 어머니가 누군가에게 업혀 나가고 크리스마스이브에 결혼할 그의 약혼녀가 핏기 없는 얼굴로 주륵주륵 눈물만 흘리고 있는 걸 보면서 나는 내 양말 걱정만 했다. 싸가지 없고 이기적인 년. 니가 그런 년이라 널 좋아하지 않은 거야, 라고 그 사람이 말하는 것 같다. '이제 저 어머니는 어떻게 살까라는 걱정이 문득 든다.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야 할 그 어머니의 가슴이 얼마나 견디기 힘들게 무거울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절대 아물지 않겠지. 그게 어머니일 테니까. 그리고 그 사람의 여자. 결혼도 하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저 여자는 또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을 만나 사랑을 하고 또다시 결혼이라는 걸 할 수 있을까? 아마 지금은 따라 죽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 거다. 그리고 따라 죽지 못함에 절망하고 그러다 시간은 흐르겠지.'“당신 진짜 나쁘다.”'나만 들리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채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남겨두고 가는 사람들 곁에서 목 놓아 울고 있을 그 사람이 듣도록 속삭이듯 말했다. 좋은 사람이라 좋아하기 시작했는데 막상 떠날 때는 많은 사람 가슴에 지우지 못할 상처를 남긴 나쁜 사람이 됐다. '상주들과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나는 다시금 힘없이 주저앉아 있는 그 사람의 여자를 힐끔 돌아보았다. 손이라도 잡아 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이겨내라고 진심 어린 위로도 해주고 싶다.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테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당신 남자를 내 멋대로 가슴에 품어서 미안했다고 사과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한지원, 이쪽으로 와.”'장례식장에 와서는 아무것도 안 먹고 그냥 가는 거 아니라는 누군가의 말에 선배들 틈에 껴서 쓴 소주 한 잔을 받아마셨다. 그 사람의 영정 앞에서 내가 소주를 마실 줄은 몰랐다. 그 사람의 죽음을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 당연한 거겠지만, 나는 왜 그 사람이 죽은 것보다 첫사랑을 잃은 내 자신이 더 아프고 내 처지만 처량하게 느껴지는 건지 이기적인 나와 대면하며 술잔을 기울였다.'“천천히 마셔라.”'선배의 말에 대꾸도 없이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목이 갈라질 것 같은 갈증에 술은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다. '“세상 참 허무하다.”'“그러게 말이다.”'씁쓸하게 술잔을 기울이는 선배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쏠렸다. 부러움의 눈길이 동정의 눈길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예쁘고 착한 여자와 결혼하는 그 사람을 꽤나 부러워했었다. 그중엔 배 아파한 사람도 분명 있으리라고 본다. 그렇다고 그들이 나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부러워했다고 그 사람의 불행을 빈 사람을 없었을 거다. 좋은 사람 주위엔 좋은 사람이 따르는 법이니까. '그럼 나도 좋은 사람이었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중간은 됐을 것 같다. 돌려 말하지 못하고 상대의 기분을 살펴 빈말도 할 줄 모르는 나지만 그렇다고 남을 해코지하거나 생채기가 날 만큼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적은 없으니까 나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지원이도 소식 듣고 많이 놀랐겠다.”'“……그렇죠 뭐.”'울음이 섞여 나올까 봐 입을 꾹 다물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목소리는 담담했다. '1년 전, 그 사람에 대한 짝사랑을 독하게 끝내면서 정말 감정 정리가 끝나서 그런 걸까? 내가 그렇게 깔끔한 사람이었나? 아니다. 그건 아닐 거다. 가끔 그의 전화를 받을 때면 여전히 가슴이 뛰었고 어쩌다 그와 같이 갔던 곳을 지나칠 때면 그를 지운 빈 가슴으로 휑하니 바람이 들어오기도 했었다. 1년이란 시간 동안 난 그 사람을 깨끗하게 잊기 위해 애를 썼을 뿐이지 완벽히 그를 잊은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사람이 사람을, 그것도 마음 한 자락을 내주었던 사람을 깡그리 지운다는 건 어쩌면 지루한 시간 싸움일지도 모른다. 치열하게 사랑하진 않았어도 내 젊은 날의 한 부분을 떼어준 사람이니 지루한 싸움이 끝나고 난 후에도 그 사람은 내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