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러지 마세요! 왜 이래요!”'“어허! 가만히 있어.”'“싫어요.”'“금방 끝날 테니 움직이지 말라니까.” '“이 아저씨가 정말!”'시영은 무릎을 굽힌 채 자신의 앞으로 앉아 있는 주인집 남자를 노려보았다. 다짜고짜 그녀를 안아 든 그는 곧장 집으로 들어와 그녀를 소파에 내려놓은 상태였다. 그래, 여자가 넘어져 있으니 적어도 그 정도의 기사도 정신은 필요하겠지. 하지만! 다 큰 처자의 다리를 조물거리며 바지를 들춰 올리는 심보는 뭐냐고! '“생각보다 상처는 심하지 않구나.”'그녀가 입고 있던 바지를 무릎 위까지 올려놓은 그가 조금은 안도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별일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넘어지는 일은 매일 밥 먹는 일처럼 일상적인 것이었다. 나이 먹고 참 칠칠맞다고 말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이 먹었다고 넘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그래도 어렸을 때는 다니다 넘어지면 귀엽게라도 봐주지, 지금은 한심하게 보지 않은 것만으로 다행이다. '‘네가 늘 하늘만 바라보니까 땅이 질투를 해서 그런 거다. 땅이 널 너무 사랑하는 거지. 나처럼 말이다.’ '문득 떠나온 그 사람의 말에 처음 그 말을 들었던 그날처럼 웃음이 났다. 그날은 그에게 첫 고백을 받은 날이기도 했다. 친구였던 그가 연인이 되었던 날. 어울리지 않은 엉뚱한 말을 하며 진지하게 바라보는 그의 눈빛 때문에 차마 거절하지 못했던 고백이었다. 차라리 그때 그 마음을 받아주지 말았어야 했을까.'“아앗!”'시영은 무릎에 난 상처위로 느껴지는 쓰라림에 놀라 소리 질렀다. 그 소리에 소독약을 바르고 있던 무열이 멈칫하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잠시 시선을 맞추던 그가 미미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소독약과 약을 마저 바르고 일어났다. '“곧 괜찮아 질 거다.” '“고맙습니다. 근데 저기……”'“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저랑 아저씨랑 혹시 아는 사이인가요?”'굳이 그렇게 대놓고 물어볼 생각은 아니었다. 혹시라도 모를 관계의 중요성에 있어서 잊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면 굉장히 미안해질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려니 뭔가 찝찝했다. 자신을 대하는 주인남자의 갑자기 변한 태도도 그렇고, 도저히 생각나지 않는 이 집의 주인남자에 대한 묘한 기분은 감출 수가 없었다. 민망하긴 해도 막상 질문을 던지고 나니 시원하면서 상대가 말해줄 대답에 무한한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정작 그의 대답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 요상한 표정이라는 것이 문제지만. 거기다 이마 위로 툭하고 가볍게 날리는 꿀밤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시영은 약상자를 들고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그를 보며 의아함에 다시 불러 세우려고 했다. 아까부터 계속 버티고 서 있던 사내가 다가오기 전까지 말이다. 그녀는 첫눈에 선배가 말해주었던 집주인 남자의 아들이란 존재를 기억해내며 그가 그 ‘아들’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집주인 남자만큼이나 훤칠한 키에 꽤 잘생긴 외모의 소유자였다. 고등학생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전혀 학생 같지 않은 성숙함까지 갖추고 있다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학교에서 얼마나 인기가 많을지는 상상이 저절로 되는 놈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있다면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그녀를 보란 듯 훑어 내리는 녀석의 태도였다. 아버지란 사람은 반듯한 느낌인데 녀석은 딱 봐도 날라리가 분명했다. '‘공부만 하는 놈이라더니 다 헛소문이군.’'“이 층에 들어온 사람이 그쪽이야?” '“그렇긴 하다만, 말이 너무 짧은 느낌이구나. 너 주인아저씨 아들 맞지? 내가 심하게 어려보이는 것은 있겠지만, 고등학생인 너에게 반말이나 들어야 할 나이는······.”'“이름이 뭐야?”'대놓고 그녀의 말을 잘라버린 녀석이 물었다. 시영은 눈을 가늘게 흘기며 한 대 쥐어박아버려 하는 고민에 휩싸였지만 키가 워낙 커서 손을 뻗는다고 머리에 닿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리고 괜히 남의 집 귀한 자식 때려놓고 이사 오자마자 쫓겨나는 것도 웃기는 일일 테니까. '그녀가 그렇게 짧은 고민을 하는 동안 갑자기 녀석의 머리가 앞으로 툭 쏠렸다. 뭔가 하니 약상자를 가져다 놓고 나온 무열이 녀석의 머리를 살짝 때린 것이었다. '“강도율. 어디서 말버릇이 그래? 어서 사과드려.”'“싫어요.”'“어허, 이 녀석이 왜 안하던 짓을 하고 그래? 어서 사과드려.”'하지만 도율은 휑하니 방으로 들어가 버릴 뿐이었다. 시영은 성난 표정으로 뒤쫓아 가려는 무열을 가로막으며 어색하게 웃었다.'“괜찮아요. 딴에는 제가 편해 보였나보죠. 그냥 두세요.” '“넌 아직도 안 올라가고 여기서 뭘 하고 있어?”'“네? 아, 지금 올라가려고요. 약 감사했습니다. 그럼.” '찬바람이 도는 그의 태도가 거북스러워진 시영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1층을 빠져나왔다. 아들이고, 아버지고 정말이지 궁금증을 유발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보다 분명히 저 아저씨를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봤었지?”'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는 2층으로 향했다. 열 개 정도의 계단을 힘겹게 오르고 2층 현관에 도착한 그녀는 머리를 스치는 하나의 기억에 그대로 멈춰 섰다. '“뭐, 뭐야! 얼음독사 강무열?” '그를 처음 만난 건 중학교를 막 졸업했던 그해였다. 긴 겨울이 끝나고 따스한 봄이 오던 그때, 새로운 한해로 인해 여기저기 시끌벅적하던 시기였다. 그녀도 앞으로 입학하게 될 고등학교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어수선할 때였다. 고작 열일곱 살 어린 그녀에게 고민이 있어 봤자겠지만, 그때는 그 나름대로 세상의 중심에 서 있다고 여겼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