굵은 황촉이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촉대(燭臺)에 장식되어 있는 나비의 고운 날개가 불길에 금방이라도 화르르 불타버릴 듯 위태로워 보였다. 부나비인가. 그런가 보다. 부나비인가 보다. 하찮은 미물에 불과할지라도 하늘이 내린 운명은 무겁기만 해 죽음에 이르는 길인 줄 알면서도 따를 수밖에 없는……. 그래서인지 황촉의 눈물도 굵었다. 굵은 몸을 따라 흘러내리는 촉루(燭淚)가 유난히도 많은 밤이다.'가지런히 늘어져 있는 여러 종류의 화장 도구 중 미안수(美顔水)가 담긴 작은 도기 병을 집어 드는 손가락이 부러질 듯 가늘었다. 연꽃이 그려진 자기 분합의 뚜껑을 열자 고운 백분 가루가 향긋한 향기를 뿜으며 담겨 있었다. 헝겊으로 둥글게 만든 분첩에 분가루를 묻혀 엷게 펴 발랐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얼굴이 더욱 희어졌다. 홍화(紅花)와 주사(朱砂)가 담긴 두 도자 용기에서 잠시 머뭇거리던 손은 좀 더 짙은 색을 내는 주사의 도자 용기함을 열었다. 가는 붓에 선홍빛을 띤 주사를 듬뿍 묻혀 입술에 발랐다. 붓질이 스칠 때마다 피처럼 붉은 색깔을 입술에 덧입혔다. 다른 붓을 잡아 검은 묵을 갠 기름을 묻혀 눈썹을 그렸다. 속눈썹도 가늘게 그렸다. 덩굴나무처럼 틀어 올린 머리칼에 윤기를 더하기 위해 동백기름을 발랐다. 백옥으로 만든 매화잠을 머리에 꽂고 비녀에 딸랑이는 매화 모양의 보요(步搖)를 달았다. 향낭을 챙기는 것을 마지막으로 화장을 끝냈을 때 술시(戌時)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면경(面鏡)을 바라보며 화장을 점검하던 여인은 깜짝 놀라 종소리가 난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바람에 비녀에 달려 있던 보요가 좌우로 거칠게 딸랑거렸다. 여인은 열어둔 화장 도자기의 뚜껑을 모두 닫은 후 방의 중앙에 있는 원탁으로 걸어가 앉았다. 황촉이 곱게 단장한 여인의 얼굴을 비췄다. 꿈꾸듯 몽롱한 여인의 눈동자를. '여인은 기다렸다. 지금쯤이면 자리에서 일어나셨겠지. 궁을 나와 후궁 복도로 귀한 걸음을 내딛으셨으려나. 어서어서 오시어 사랑하는 임의 얼굴을 뵐 수 있으면 좋으련만.'일다경이 지나고…… 한식경이 흐르고…… 한 시진이 사라졌다. 황촉의 길이가 절반의 절반으로 짧아졌지만, 여인의 전각을 찾아오는 이는 없었다. 여인은 화장이 흐트러질까 염려스러운 듯 동쪽 하늘이 뿌옇게 밝아올 때까지 몇 번이고 가는 손가락을 나붓거리며 연지를 새로 바르고, 눈썹을 고쳐 그리고, 머리를 다시 올렸다. 찾아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풀어질 리 없는 머리를 꾸미고, 또 꾸미길 반복했다.'곁방 안쪽에 미동도 없이 쪼그려 앉은 작은 그림자가 있었다. 밤을 꼬박 새우며 기다리는 여인의 처연한 행동을 고스란히 훔쳐보고 있는. 작은 그림자는 밤새 달그락거리는 화장 도구의 소리를 들었고, 비녀와 보요의 머리 장신구들이 부딪치는 애처로운 소리도 들었다. 동녘 하늘이 서서히 밝아오면서 어둠만 가득 차 있던 작은 방도 조금씩 환해졌다. 무릎을 세운 채 문에 등을 기대고 있던 작은 그림자는 곧 들려올 소리에 귀를 막으며 세운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아악! 어째서 날 찾아주시지 않지! 왜 날 보러 와주시지 않는 것이냐!”'어머니의 한탄 어린 비명 소리는 곧 울음소리로 바뀌었다. 머리에 꽂은 비녀와 보요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쨍그랑거렸다. 침상에 몸을 던진 어머니의 흐느낌이 작은 여아의 손바닥을 뚫고 들어왔다. 여자아이는 머리를 내저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같이 치르는 일에 어미보다 아이가 먼저 지쳐버렸다. 곧 열두 살이 되는 아이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아비가 어미를 찾아오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어미의 끝없는 기다림. 제 자식도 돌아보지 않은 채 하루도 몸단장을 게을리 하지 않는 어미의 미련스러운 집착. 오늘도 어미는 저리 울다 지쳐 잠든 후 밤이 되면 또 보는 이 없는 화장을 하리라. '아이는 무릎에 묻고 있던 고개를 치켜들었다. 발육이 더뎌서 열한 살인데도 아홉 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계집아이는 굳은 얼굴로 흐느끼는 울음소리를 뒤로한 채 방을 나섰다. 뭔가 결심을 한 듯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단호한 얼굴로 걸음을 내딛었다. 어미의 울음소리에 붙들릴 것이 두려운 듯 작은 머리통을 꼿꼿이 든 채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쌀쌀한 새벽바람에 이제 막 꽃봉오리를 맺기 시작한 목단화의 가지가 휘청거렸다. 겨우내 움츠리고 있던 나뭇가지마다 새순을 준비 중이리라. 이 찬바람이 가시면 궁의 화원에는 오색 꽃이 만발할 것이다. 누군가 자신을 꺾어주길 기다리는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 지길 반복할지니…….'계집아이는 이른 시간이라 아무도 없는 화원 뒤편을 조그만 발로 또박또박 걸어갔다. 오래된 송림(松林)으로 들어서자 세상은 아직 어스름한 어둠 속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캄캄한 세상.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외로운 세상. 헤매고 헤매다 주저앉아버릴 듯한 무서운 세상. 계집아이는 두려워 작은 가슴팍에 그보다 더 작은 주먹을 올려두었다. 사방의 어둠이 무서운 악귀가 되어 달려드는 듯했다.'“정했느냐?”'달려들던 어둠의 악귀가 단번에 물러났다.'계집아이는 땅을 향하고 있던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난 곳을 찾았다. 허리가 굽은 오래된 소나무 아래 중년 여인이 서 있었다. 엄중한 구중궁궐에 함부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중년 여인은 태연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이 든 딱딱한 얼굴에 엄한 눈길이 일견 차고 정 없어 보였지만, 계집아이는 개의치 않았다. 그래도 저 여인은 자신을 똑바로 봐주지 않는가. 세상천지 아무도 돌아봐주지 않는 자신을 처음으로 봐준 여인이었다. 계집아이는 망설임을 죽였다. 중년 여인은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지나가는 바람처럼 스치듯 물어보았을 뿐, 이곳으로 나온 것은 온전히 자신의 결정이었다.'달도 뜨지 않은 그믐밤.'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열두 살 생일을 바로 눈앞에 둔 이월의 마지막 날.'계집아이는 과거를 버렸다. 아비가 내린 성을 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