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은 좀처럼 찾지 않던 연남동을 뒤지고 뒤져 동네 놀이터 옆에 붙어 있는 1층 건물의 작은 파출소를 찾아냈다. 장장 한 시간이 걸린 노력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백민은 파출소를 눈앞에 두고도 좀처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놀이터 앞에서 서성대던 백민의 붉은 입술에서 기다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담배 생각이 절실했다. 그는 호주머니를 뒤져 마지막 남은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짙은 회색의 매캐한 연기가 공기 중에 산산이 흩어졌다. 시나리오 작업으로 호텔방에 일주일간 틀어박혀 있다 나온 백민은 오랜만의 외출로 머리가 띵하니 울리는 느낌에 인상을 찌푸렸다. 제길.'대지를 태울 것 같던 뜨거운 여름 날씨가 한풀 꺾이고 하늘은 높고 푸르기만 했다. 이 좋은 날에 백민의 가슴은 돌덩이가 내려앉은 듯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미간을 찌푸린 백민은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끄고 꽁초를 집어 들었다. 폼은 안 나지만 파출소 앞에서 꽁초를 버릴 만큼 그는 대담하지 않았다. 백민의 가슴을 짓누르는 원인은 지금 파출소 안에서 그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다. 파출소 안을 노려보는 백민의 검은 눈동자에 짜증이 가득했다. 백민은 못마땅한 얼굴로 그를 이 자리로 오게 한 통화를 떠올렸다.''백민이 붙잡고 있는 시나리오 작업은 거북이걸음보다 더디게 움직이고 있었다. 워드프로세서 페이지가 열려 있는 하얀 모니터와 눈싸움만 하기를 다섯 시간째, 백민은 결국 모니터와의 눈싸움을 포기했다. 의자를 박차고 일어난 백민은 곧장 침대로 뛰어들었다. 그의 무게를 못 이기고 매트리스 스프링이 파도처럼 요동쳤다. 백민은 부드러운 베개에 머리를 묻으면서 자연스럽게 예영을 떠올렸다. 그녀의 하얗고 투명한 피부, 금방이라도 맑은 이슬을 떨어뜨릴 것 같은 커다란 눈동자, 체리 맛이 나는 붉고 탐스러운 입술, 마지막으로 날씬한 몸매가 머릿속에 그려지자 그의 몸 한가운데로 열기가 집중되기 시작했다. 욕구불만이었다. '백민은 입맛을 다시며 머릿속으로 바쁘게 예영의 스케줄을 확인했다. 그녀는 이번 주에 홍콩에서 화장품 광고 촬영이 있었지만 지금쯤이면 그녀도 한국으로 돌아와 집에서 주말 드라마 대본 연습을 할 것이다. 침대에서 윗몸을 일으킨 백민은 예영에게 전화를 하기 위해 일주일 만에 휴대전화 전원을 켰다. 시원한 바람소리와 함께 휴대전화 전원이 들어왔다. 백민이 저장되어 있는 예영의 단축번호를 누르려는 찰나 휴대전화가 울어댔다. 백민은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어 못마땅한 눈빛으로 발신인을 확인했다. 낯선 번호였다. 그가 전화를 받을지 말지 고민하는 사이에도 상대방은 끈질기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 '백민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받지 말라는 마음속의 유혹을 눌렀다. 물론 그 유혹을 따라도 되지만 한 번 마음이 동한 백민은 서둘러 예영에게 전화를 하고 싶었다. 이 끈질긴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전화통화는 빨리 끝내면 된다. 그리고 원래의 목적인 예영에게 전화를 하는 것이다.'백민은 서둘러 통화버튼을 눌렀다. '[나야.]'백민은 아차 싶어 눈을 꼭 감았다. 예상대로 불길한 예감의 원인인 찰거머리였다. 일주일 만에 휴대전화를 켰는데 그걸 또 어떻게 알고 꼭 맞춰서 전화를 하는지, 어떤 의미에서는 대단한 신통력을 가진 찰거머리였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