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 눈이 오기 시작했다. 정작 1월엔 눈이 별로 안 오더니 2월 들어서 벌써 폭설만 세 번째이다. 오늘도 설마 그런 식으로 뒤통수를 맞게 될까 싶어 마리는 조안과의 통화가 끝나자마자 일기예보 검색에 들어갔다.'마담―즉 조안 양은 눈이 오기 시작했으니까 한 시간쯤 늦어도 어쩔 수 없다며 과자나 먹으며 기다리라는 분부를 내렸다. 하루 종일 공사장에서 일하느라 녹초가 된 마리의 굶주림 따위는 조안에게 먹히지 않았다. 그러려니 한다. 가끔 태연자약하게 드러나는 조안의 무자비한 면모는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는 조안의 마력 중 하나이니까. 마리는 아주 틀림없는 조안의 사람이고.'“적설량 5 내지 10? 일기예보를 보면 뭐하나. 얼마나 온단 건지 감이 안 오는데. 우우웅, 배고파. 배고파서 눈이 들어간다.”'가벼운 푸념과 함께 테이블에서 일어난 마리는 재빨리 주문대로 가서 핫초코를 주문하고 건포도가 먹음직스럽게 박혀 있는 머핀도 샀다. 처음엔 하나만 생각했으나, 자리로 돌아올 때 머핀은 3종이 되어 있었다.'“괜찮아. 이건 빵이 아니라 과자. 그래. 군것질일 뿐이야.”'그런 자기 합리화와 함께 머핀을 덥석 입에 물었다.'“으으으으으으!”'부르르 떨면서 마리가 내지르는 괴성에 주위 사람들이 움찔 놀라 돌아보았다. 돌아본 사람들은 머핀 한 입에 행복해서 돌아가시게 생긴 여자를 구경할 수 있었다.'부들부들, 감격에 몸을 들썩이면서 마리는 머핀을 입에 쏟아 부었다. 머핀은 그녀의 입에 들어가는 족족 녹아내렸다. 그렇게 두 개의 머핀을 순식간에 해결한 뒤, 핫초코를 들어 마셨다. 마리의 눈이 반달에 이어 초승달이 되나 싶더니 그믐달이 되어 사라졌다.'아직까지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이 피식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먹을 거 하나에 이처럼 대놓고 행복할 수 있는 나이가 이미 지나버린 사람들이 상당수였지만, 그들에게도 마리의 행복 바이러스는 조금씩이나마 전염되었다.'주위 사람들이 그녀 덕분에 얼마라도 더 즐거워졌다는 것은 꿈에도 모르는 채 마리는 핫초코를 후후 불면서 꿀꺽꿀꺽 삼켰다. 그러다 마리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엥, 저런 곳에서 뭐하는 거야.”'마리는 유리쪽으로 바짝 붙어 앉으면서 바깥을 내다보았다. 좀 전까지 눈에 보이지 않던 무언가가, 배가 좀 차니 들어왔다.'사람이다. 교복으로 보이는 옷을 입은 여자애가 인도 중간에 마련된 자그마한 쉼터용 정자에 앉아 있었다. 마리와 눈이 마주치자 씩 웃었다.'마리는 입맛을 다시면서 고개를 돌렸다가 핫초코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바깥을 내다보았다. 여자애는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고 발을 까딱까딱하고 있었다.'무시하려고 했지만, 그냥 두기엔 바람이 꽤 세보였다. 내리는 눈이 쌓일 겨를도 없이 날릴 정도니까. 정신이 약간 이상하다고 해서 이런 날씨에 추위에 떠는 게 괜찮을 리 없다.'남들이 오지랖이라 욕하든 말든 마리는 마음이 불편해지면 당장 그걸 해소하기 위해 움직이는 타입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렇게 했다.'“어이, 지금 눈 오는 거 안 보이니?”'“저 주시는 거예요?”'“그래. 몸이나 녹이라고.”'마리가 사온 핫초코를 건네자, 여자애는 사양 않고 냉큼 받아서 꿀꺽꿀꺽 마셨다. 상당히 뜨거울 텐데도 그런 기색도 전혀 없이.'“어우, 살겠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이젠 좀 정신이 나네요.”'여자애의 말투에서 사투리 느낌이 묻어났다. 교복 재킷 칼라 끝에 달린 교표에 학교 이름이 적혀 있는 걸 보니 그 확신은 분명해졌다.'“여기 애 아니지, 너?”'“예. 어쩌다 일이 생겨서 올라왔는데 내려갈 여비가 없어서요. 핸드폰도 어느 틈엔가 잃어버리고. 제가 좀 그런 거랑 잘 안 맞거든요. 사준지 두 주도 안 됐는데 잃어버렸으니 내려가면 노원이한테 또 한 소리 들을 거예요.”'“핸드폰이라도 빌려줘?”'“아, 어차피 전화번호도 못 외워요. 숫자는 영. 산수부터 거의 손 놨었거든요.”'이상한 아이다. 다른 사람들한테 이상한 사람이란 소리 곧잘 듣고 사는 마리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을 때엔, 이 아이는 퍽이나 이상한 애란 소리가 된다.'“그래서 여비를 모으려고 그런 걸 해?”'마리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아까부터 아이가 들고 있던 노트가 있었다. 빈 페이지에 굵은 펜으로 적힌 말은 간단하다.'<관상 봐드립니다>'아이가 해죽 웃었다. 마리도 덩달아 웃다가, 짐짓 엄한 표정으로 나무랐다.'“그나마 날씨가 궂어서 그렇지, 애먼 봉변을 당하기 십상이야. 너 사는 곳은 어떤지 몰라도 여긴 정말 눈 감으면 코 베어가는 놈도 있어.”'“헤헤헷, 그런 놈들은 알아서 피할 수 있어요. 저도 방향 잘 봐서 귀인이 올 법한 곳으로 온 거니까.”'“귀인이 오기 전에 너부터 얼어 죽겠다. 뭣하면 이 근처에 청소년 보호 쉼터 있는 데라도 가. 하룻밤쯤은 재워줄 거야. 아침 되면 부모님한테 전화 하고. 설마 집 전화도 모른다고 할 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