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버니, 오라버니!'더워요. 뜨거워 죽겠어요! '구해 주세요, 여긴 너무 무서워요!'귓가에서 절박한 누이들의 음성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내는 불구덩이 속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간 여린 누이들을 생각하며 피눈물을 삼켰다. 미친 듯이 포효하고 닥치는 대로 검을 휘두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지만 애써 자신을 다독였다. 아직 구해야 할 사람이 남아 있었다. 누이들은 허망하게 보냈을지라도 마지막 남은 그분은 지켜드려야 했다. '구역질나는 피 비린내가 코끝을 찌른다.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곳을 두고 하는 말일까. 옷자락을 붉은 핏물로 물들이고서 늘어진 궁녀들과 흉한 조화를 이루려는 듯, 건물엔 불씨가 돋았다. 대들보를 타고 지붕으로 삽시간에 번진 불길은 그 기세가 대단했다. 참혹한 광경을 모두 기억에 남길 작정으로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고 훑은 사내는 앞마당 한 가득 누워있는 궁녀들을 밟고서 태후전으로 들어섰다.'‘부디 살아계십시오 어마마마. 못난 아들일랑 절대 용서 마시고 제발 살아주세요.’'간절한 마음으로 검을 단단히 부여잡은 그는 이내 억누를 수 없는 살기를 뿜어내며 태후의 침전 안으로 향했다. 역도(逆徒)의 수장인 숙부 유친왕(柳親王)의 단전에 꼭 제 손으로 검을 찔러 넣으리라 작정한 젊은 사내는 급한 손길로 무수히 많은 방문을 하나씩 열었다.'절대 살려두지 않겠다. 피를 나눈 숙부의 몸으로, 어린 내 아우들을 무참히 살해한 그 더러운 손을 직접 단죄하리라! '억누를 수 없는 배신감에 몸을 떨면서 피멍이 들 정도로 아랫입술을 깨문 그는 복도의 끝, 가장 작은 쪽방의 문을 벌컥 열었다.'“아니 돼! 태겸아, 어서 나가거라! 어서!”'방문이 열림과 동시에 안에서는 태후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생각보다 늦게 왔구나, 조카야.”'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유친왕 주원성이 천천히 등 돌려 그를 마주보았다. 한때는 아버지와 같은 자애로운 바람을 품었던 숙부의 눈빛이, 오늘은 더없이 시리게만 느껴졌다. 돌아선 숙부에게서 이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린 모후에게로 시선을 옮긴 태겸은 절규했다.'“어마마마!”'마당에 깔린 궁녀들처럼 이미 태후의 복부에도 핏물이 번지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여동생 둘이 죽고, 황제이신 형님의 생사가 묘연하다. 모후마저 저 지독한 칼날 아래 당했으니 태겸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죽여 버리겠어!”'태겸의 검 끝이 제게로 향하는 것을 지켜보던 주원성의 입술이 눈에 띄게 비틀렸다.'“내가 가르친 무예로 이 숙부를 이겨보려 함이냐? 그래도 내 너를 어여삐 여겼던 정을 생각하여 목숨만은 살려주려 했거늘, 이를 두고 배은망덕이라 하는구나.”'“닥쳐! 당신을 따랐던 지난날을 할 수만 있다면 모조리 되돌리고 싶어!”'태겸은 검에 온 힘을 실어 자리를 박차고 뛰어 올랐다. 태후의 복부에 꽂은 검을 뽑아든 주원성은 재빠르게 태겸의 검을 막아냈다.'챙!'날카로운 금속소리와 함께 태후의 몸이 쿨럭쿨럭 더운 피를 쏟아내며 그예 풀썩, 꺾여버렸다. 무겁게 바닥으로 쓰러지는 모후에게 시선을 빼앗긴 태겸은 틈새를 노리고 날카롭게 파고드는 숙부를 검으로 뿌리쳐내고는 그녀에게로 달려갔다.'“어마마마, 눈을 떠 보십시오. 이리 가시면 아니 됩니다!”'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어미의 붉은 피를 급하게 손으로 막으면서 태겸은 그녀를 끌어안았다.'이것은 지독한 악몽이다. 이 사단을 만든 저 이는 한없이 자애롭던 그 숙부가 아니다. 한낱 몽마(夢魔)가 장난을 심하게 치는 것이리니. 차라리 이리 믿고 싶었다. 눈 뜨고 일어나면 누군가 그저 꿈이었노라 위로해주었으면 싶은 현실. 꿈이 아니라서 괴로운 현실이다.'차갑게 식어가는 모후의 몸을 끌어안은 태겸의 뒷모습을 놓치지 않은 주원성은 비소(誹笑)를 물었다.'“상대에게 등을 돌리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라고 무수히 가르치지 않았더냐!”'주원성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태겸의 등을 향해 빠르게 검을 겨눴다. 마지막 남은 이 지긋지긋한 조카 놈만 해치우면 경안국(勁安國) 황제의 옥새를 온전히 차지할 수 있었다. 날카로운 검 끝이 태겸의 살갗에 닿을 찰나, 주원성은 그보다 빨리 자신의 옆구리를 관통한 서슬 퍼런 칼날을 내려다보게 되었다.'“크윽! 어찌, 어찌 네놈이…….”'“그리고 당신이 말했었지. 등 뒤에도 눈을 달고 있어야 한다고!”'마치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포효한 태겸은 주원성의 옆구리에 꽂은 검을 뽑아 이번엔 숙부의 가슴을 그었다.'“네가, 네가 어찌 나를…….”'“아들처럼 따르던 조카가 당신을 벤 것이 그리도 믿기지 않는가? 허면 나도 하나 묻지. 당신은 어찌 나를 역천(逆天)의 밑천으로 삼을 수 있었지? 어찌 어린 조카들의 피를 손에 묻힐 수 있었지? 어찌 형수에게 검 날을 박을 수 있었지?”'살기와 원한에 사무친 태겸의 눈동자를 바라본 주원성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을 마치 아비처럼 따르기에 손쉽게 움직일 수 있는 장기 말로 여겼던 조카다. 이제 보니 호랑이 새끼를 키운 꼴이지 않은가.'“당신이 할 수 있으면, 나도 충분히 할 수 있어!”'씹어 뱉듯이 낮게 읊조린 태겸은 마지막으로 주원성의 가슴 깊숙이 검을 박아 넣고는 그대로 그를 벽으로 밀었다.'“으아아아!”'“크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