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싫증났다. 여자 있어.”'마치 모래시계의 최민수 성대모사를 하는 것처럼 몹시 비장하고 비감 어린 어조였다.'“또 왜 그러는데.”'수현이 일부러 못들은 척 피식 웃었다. 제대로 안 먹히는 멘트가 돼 버리자 혁재가 인상을 썼다. 비극의 여주인공에게 재차 확인시켜 주려는지 제법 단호하게 말했다. '“헤어지자!”'과연 혁재답다. 이런 개쉐이! '하와이 출장 잘 갔다 와서 일주일 만에 보는 여자 친구에게 하는 꼬락서니가 아주 가관이다. 혁재는 좋은 유전자를 조금도 받지 못한 것일까. 아버지의 졸부 기질을 이어받아 돈 자랑이 하늘을 찌르는 것 이외에 그에 대한 기억은 전무하다. 어떻게 헤어지자는 말을 자기한테 조금도 피해가 가지 않는 이기적인 말투로 하는지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다. 혁재는 꼭 말을 저렇게 싸가지 없게 한다. 더 끔찍한 부작용이 일고 있는 그의 입술이 구토가 치밀 정도로 쉴 새 없이 실룩거렸다. 수현은 그를 노려봤다. 서울의 대표적인 벚꽃 명소인 영등포구 여의도 윤중로에 날벼락이 떨어질 줄은 차마 몰랐다. 그가 빤히 보며 어색한 미소를 짓자 갑자기 왁싱으로 아침부터 고생한 다리가 따끔거렸다. 수현이 어이없이 웃었다.'“하하! 말도 안 돼. 너 또 하와이에서 여자하고 007작전 펼쳤냐? 여자가 먼저 가고 네가 뒤따라가는 연예인 밀월여행 수법 또 썼어? 안 그래도 여자들이 줄줄이 사탕인 걸 몰라? 돈 자랑하니까 여자가 전신 마사지하고 난리 블루스 춰 줬어?”'“야! 소설 쓰지 마! 농담 아니거든? 나 지금 진지해. 제발 비아냥거리지 마.”'“말이 쉽지. 헤어지자는 말 내가 해야 돼. 그때까지 잔말 말고 있어. 그리고 이렇게 아름다운 벚꽃 명소에서 너무하지 않니?”'“오늘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큰 맘 먹고 말하는 거야.”'“구체적인 이유가 여자가 생겨서야?”'“넌 나보다 훨씬 멋진 남자를 만날 자격이 있어.”'“난 지금 널 만날 자격밖에 없거든? 죽기 싫으면 헤어지자는 말 취소해.”'“무섭게 왜 그래. 쿨 하게 헤어지는 게 서로에게 좋잖아.”'“내가 무섭다고? 언제는 터프한 여자가 좋다며! 세련된 도시형 워킹걸이라고 말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설레발을 쳐!”'“처음에는 개성 있고 특이해서 좋았는데 지금은 전혀 아니야. 내 이상형은 청순가련형이었어. 여자답지 못한 너한테 질렸어. 미안하다.”'“그래서 지금 만나는 년이 김태희처럼 청순가련형이야? 부동산 경매하는 것도 아니고 여자 갈아치우는 대회 좀 나가 봐!”'“말 좀 가려서 해. 너 여자 맞아?”'기껏 폼을 잡고 이별의 이유를 두서없이 갖다 대는 그의 입을 쭉 잡아 빼서 벚꽃 나뭇가지에 걸어 놓고 싶었다. 그동안 혁재에게 희생과 봉사를 몸소 실천한 그녀로서는 억울한 이별선언이었다. 벚꽃 길 한가운데 서 있는 그녀의 머리 위로 팝콘 같은 꽃잎들이 내려앉았다. 그녀 옆을 지나가는 젊은 연인들, 중년의 남녀들은 각각 사랑을 속삭이는 모습으로 얄밉게 비춰졌다. 인간의 뇌란 참 신비하다. 실연의 상처를 느끼는 뇌와 다른 사람들의 애정행각을 느끼는 뇌가 동시에 쓰나미처럼 겹겹이 밀려들었다. 혁재는 자기가 영화에 나오는 멋진 카사노바처럼 그녀의 어깨를 살짝 안았다. 어라? 이게 죽으려고 환장을 했군. 키 높이 구두 깔창을 10cm 더 깔았나? 뭘 믿고 까부는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한 번 끝까지 놀아 보시지. 아주 끝장을 내주마.'“아! 너와 이런 곳에서 이별의 순간을 맞다니 너무 로맨틱하다.”'가소로운 놈! 능구렁이 같은 놈! 이게 쥐약을 먹고 뭐라고 주절거리는 거야. 정신 병원에 처넣어 버릴까 보다. 수현은 결심한 얼굴로 적당한 내숭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갑자기 왜 그래! 내가 뭘 잘못했는데 헤어지자는 거야?” '“이건 예전부터 하고 싶은 말인데 수현이 너, 살 좀 빼야겠어. 뼈가 하나도 안 잡혀. 남자들은 여자의 치명적인 쇄골에 미친다는 거 몰라?”'“몰라. 내 뼈다귀가 너한테 뭘 잘못했어?”'과연 이 못된 수컷의 말로를 누가 책임질 것인가. 탄식을 억지로 삼키며 녀석의 말을 끝까지 참아냈다.'“가녀린 몸매는 평생 가도 못 가질 건 분명하고 일단 넌 너무 많이 먹어서 탈이야. 술도 좀 줄여야 돼. 그러다 알코올 중독되는 거 당연지사야.”'“으음, 그래. 또 뭐가 문제야? 마지막인데 전 남자 친구의 조언 좀 들어보고 싶네?”'“다이어트 좀 해.”'“다이어트? 네가 언제 내 몸매에 비용과 노력을 투자한 적 있어? 무슨 자격으로 내 몸 갖고 다이어트를 운운해.”'“조언해 달라며. 네 몸매는 불균형의 극치야. 키만 멀대 같이 커서 남자가 제대로 안을 수가 없잖아. 나날이 두둑하게 늘어나는 뱃살이 일종의 로열티도 아닐 텐데.”'순간 맥박이 빨라졌다.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화가 치밀어서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혁재는 가끔 그녀의 아킬레스건을 아무렇지 않게 건들릴 때가 있는데 그때가 지금이다. 수현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야! 네 똥배는 천하제일 똥돼지 뒤뚱거리는 하마 쿠션이야. 키는 난쟁이 똥자루인 주제에 어디서 감히 누굴 조언해?”'“뭐, 뭐라고? 난쟁이 똥자루? 말 다했어?”'“다했다면!”'“뭐? 당장 사과해!”'“이런 돼먹지 못한 인간이 어디서 사과를 하래.”'“이건 인격 모독이야. 세상에 태어나서 여자한테 그런 말 처음 들어 보거든? 아, 재수 없어!”'“재수 없어? 가끔씩 흠씬 나도록 패주고 싶었는데 바로 오늘인가 보다.”'이게 불행의 시작이었다. 혁재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민수현, 그런 눈으로 쳐다보면 내가 무서워할 줄 알지? 여자가 힘만 세서 어디에 써?”'드디어 그녀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이런 비인간적이고 막무가내인 인간의 작태를 더는 용납해선 안 된다. 아버지가 그랬다. 인간 말종은 때려서라도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고.'“미, 민수현!”'“이 악물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