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번데기 같죠?” '지오의 나직한 속삭임이 귓전에 스며들었다. '“음?” '혁진은 뭘 묻고 있는지도 잊은 채 지오 옆으로 바짝 다가섰다. 사과향을 닮은 살 냄새가 함께 맞은 아침의 기억을 일깨웠다. '“여자가 물었어요, 방금.”'지오가 한손으로 팔을 툭 치자 혁진은 다시 카페 안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통통한 몸매에 턱 선이 불분명한 여자는 예쁘다는 형용사와 궁합이 맞지 않았다. 남자가 고개를 가로젓더니 여자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그는 여자의 얼굴에서 거둔 손을 바삐 움직였다. '“뭐라고 하는 거지?” '혁진은 지오를 돌아봤다. '“옛날에 번데기 한 마리가 있었어. 늘 자신이 못생겼다고 절망했대. 그러던 어느 날…… 어어…….” '수화를 통역하던 지오가 발꿈치를 들면서 옆으로 살짝 몸을 틀었다. 거구의 남자가 커플이 앉은 테이블 앞을 지나갔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뺨을 쓸자 혁진은 마른 침을 삼켰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고개를 숙이면 지오의 뺨에 뺨을 마주 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온몸이 터질 것 같았어. 그래서 사랑 한 번 받아보지도 못하고 죽는구나, 하고 생각했대.”'지오의 입술이 쉴 새 없이 움찔거렸다. 혁진은 더 이상 그녀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발간 입술과 오뚝한 콧날을 훔쳐보면서, 거칠어지는 숨소리를 들키지 않으려 안간힘을 쓸 뿐이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그 번데기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나비가 되었……. 어……어……? 훔쳐보다가 들켰네.” '도란도란 중얼거리던 지오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면서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랫입술을 베어 물며 배시시 웃는 모습이 예뻐 혁진은 엷게 미소 지었다.'어둠에 젖은 하늘에서 내려온 눈송이가 하나둘씩 나풀거렸다. 지오가 장갑을 벗어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길고 늘씬한 그녀의 손가락들이 고고한 백조의 날갯짓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혁진은 지오의 턱 선을 지나 발그레한 입술에 시선을 얹었다. 주위의 소음이 잦아들고 싸늘한 어둠도 물러갔다. 머릿속은 투명하게 비어 가는데 매서운 겨울 밤공기를 깡그리 잊을 만큼 가슴은 뜨거워져만 갔다. '“은지오.” '한숨처럼 지오의 이름을 흘려내며 혁진은 지오의 팔을 잡았다. 지오가 수화를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맑고 까만 눈동자에 취해 혁진은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숙였다. '입술을 덮은 온기에 놀라 지오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혁진의 혀끝이 입술 선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자 뱃속에서 불덩이가 홱 일었다. 숨이 멎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커다란 손이 뺨을 살포시 감쌌다. 스르르 눈이 감긴 순간 눈송이가 이마에 내려앉았다. '사르르 녹는 차가움에 지오는 눈을 번쩍 뜨고 혁진을 거세게 밀쳐냈다. 입술이 자유로워지면서 그의 손이 볼에서 미끄러졌다. 지오는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지른 것처럼 굳은 표정으로 코트 깃을 여미면서 혁진을 지나쳐 걸었다. '눈을 뜬 혁진은 몸을 돌렸다. 지오가 어둠 속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사춘기에도 하지 않았던 도둑 키스라니. 주먹을 꼭 쥐고 인상을 찌푸리다가 혁진은 지오를 뒤쫓았다. '“뭔가 오해를 한 모양인데, 우린 지금 데이트 중이 아니라고요.” '옆에서 걸음을 맞추고 있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지오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만약 우리가 데이트를 한다면?”'혁진은 지오의 앞을 막아서며 물었다. 지오는 걸음을 멈추고 혁진을 올려다봤다. 이글거리는 까만 동공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그의 입맞춤에 녹아들 뻔했다는 사실을 들킬 것만 같았다. 황급히 시선을 피하자 혁진이 팔을 움켜잡았다. '“내가 데이트 상대로 모자라?”'“몰라서 물어요? 여자한테 저녁 계산하게 하는 매너하며, 플레이보이라는 평판에다 뉴욕에 얼마나 머물지 모르는 불확실성. 악조건을 두루 갖췄는데 당연히 자격미달이죠.”'지오는 잡힌 팔을 홱 잡아채고 걸음을 재촉했다. 우혁진. 명진의 사촌형이라는 사실을 제외하면 완전한 타인이다. 그런데 어쩌다 그의 입술 아래서 녹아내릴 뻔했는지. 이별 후유증을 앓느라 감상적이 되었다는 변명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건널목 너머에 지하철역 표지가 보였다. 도로 양쪽을 살핀 지오는 빨간 신호등이 켜진 건널목에 발을 내딛었다. '“사귀자고 하는 게 아니라고. 데이트 신청에 너무 많은 생각을 하는 거 아닌가?”'지오를 쫓아간 혁진은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물었다. 지오는 묵묵히 건널목을 마저 건너 지하철역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백마 탄 왕자보다 내가 나을 걸!”'지하역 입구로 들어가려는 지오의 등에 대고 혁진은 외쳤다. 돌아선 지오가 유감이라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어쩌나? 난 흑기사를 꿈꾸는데.”'혁진에게 대꾸할 틈을 주지 않고 돌아선 지오는 잽싸게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