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흔하나, 마흔둘…….”'후텁지근한 방 안에 규칙적이고 달달한 호흡이 어지러이 맴돌고 있었다. 양손에 1킬로그램짜리의 아령을 들고 팔을 굽혔다 폈다 할 때마다 가느다란 팔에 약하게나마 근육이 잡혔다. 보리는 호흡을 조절하며 팔을 팽팽하게 조이는 데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보리야, 가서 두부 한 모만 사 와라!”'열심히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보리의 귀에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녀는 애써 무시하며 고고한 취미 생활을 멈추지 않았다.'“야, 차보리! 두부 한 모 사오라니까 뭐해?” '더욱더 찢어지는 목소리를 듣고 보리는 약간 움찔했지만 여전히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아직 스무 개는 더 해야 하는데.’'그 뒤로, 바깥에선 몇 마디 더 중얼대는 소리가 있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목표 개수를 채우려고 심혈을 기울였다.'벌컥.'딱!'아령들을 내려놓고 채 방어하기도 전에 억센 주먹 하나가 그녀의 머리를 강타했다.'“엄마 말 안 들려? 두부 한 모 사오라고 몇 번이나 말했어? 빨랑 갔다 와!”'“힝, 나만 부려먹어! 보람이 있잖아?”'아령을 내려놓은 보리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어머니, 이순정 여사를 노려보았다.'“아니, 이것이 오늘 뭘 잘못 먹었나? 백수 딸내미 두고, 고3 아들내미한테 두부 심부름 시키랴? 원, 제 고3땐 숨소리조차 크게 못 내게 하더니만. 내 친구 영미는 얼마 전 생일에 딸한테서 고급 핸드백 받았다더라. 근데, 너는 심부름 하나도 제대로 안 하려고 하냐? 아이고, 내 팔자야!”'이순정 여사의 푸념에 보리가 이마를 찡그리며 마지못해 일어났다.'‘젠장, 저놈의 내 친구 영미 딸 시트콤! 이번엔 생일 선물 편이냐?’'“알았어요, 알았어. 갔다 오면 되잖아요.”'보리는 투덜투덜 대는 이순정 여사에게 손바닥을 슥 내밀었다.'“두부 살 돈 줘야지. 나 백수잖아.”'“아이고! 내가 못 살아, 못 살아!”'이순정 여사가 오만가지 인상을 다 쓰며 천 원짜리 한 장을 쥐어주었다. 밖으로 나서는 보리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거스름돈 내가 가질 거야. 심부름 값.”'“아, 그래. 마음대로 해.”'잔뜩 못마땅해 하는 이순정 여사를 뒤로한 채, 보리는 거스름돈 몇백 원에 만족한 표정으로 슈퍼마켓으로 향했다.'“판두부 작은 게 350원이니까 650원이나 남네? 하드나 사먹어야지.”''한 손에는 두부 봉지, 다른 한 손에는 파인애플 맛 나는 하드를 들고 연신 핥아대며 보리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거의 집에 다다라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보리는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사람과 부딪혀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 바람에 들고 있던 하드가 떨어져 그녀의 하얀 트레이닝 바지를 지저분하게 만들어 놓았다. '“아이참, 도대체 어딜 보고…….”'두부가 으깨어지지 않았나, 이리저리 살펴본 후 멀쩡한 것을 확인한 그녀는 상대방에게 인상을 찌푸렸다. 하드 값과 세탁비 정도는 받아낼 각오로 내뱉던 그녀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차……보리?”'상대방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을 듣게 되자 보리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아 한 손을 가슴에다 대었다. 5년 만에야 겨우 보게 된 얼굴이다. 가지런한 치아로 환하게 웃는 태양의 미소를, 훤칠한 이 모습을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그렇게나 보고 싶었던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꿈만 같았다. '“진짜 오랜만이다!”'남자의 커다란 손가락이 그녀의 어깨를 정겹게 감쌌을 때에야, 그 설렘은 급격하게 창피함으로 전환되었다. 자고 일어나서 머리 감는 것은 고사하고 세수조차도 하지 않아서 가뜩이나 지저분한데다, 운동까지 하다 나온 바람에 땀 냄새도 만만치 않았다. 보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물들었다. '‘젠장, 내가 이래서 오늘 두부 사러 오기 싫었다고. 그냥 한 대 맞고 팔 운동이나 계속 하고 있는 건데.’'보리는 억지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으, 응. 오랜만이네.”'“안 다쳤어? 옷이 다 더렵혀졌네.”'남자의 손이 그녀의 트레이닝 바지로 갈 기세이자 보리는 펄쩍 뛰며 뒤로 물러났다.'“아냐, 아냐. 괜찮아. 서, 성진아! 내가 지금 엄청 바쁘거든? 나중에 꼭 보자! 머, 먼저 실례할게!”'그리고는 집 쪽으로 냅다 뛰기 시작했다. 평소에 느려터진 그녀의 다리가 오늘따라 너무도 빨리 뛰어주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응? 잠깐만, 보리야, 보리야…….”'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보리는 그저 죽어라 뛸 뿐이었다.'‘미쳐, 미쳐! 5년 만에 보는 건데 이런 꼬라지라니, 죽고 잡다!’'헉헉거리며 집으로 들어선 보리는 던지듯 두부를 이순정 여사에게 건넸다.'“내가 가기 싫댔잖아. 왜 심부름 시켜서는!”'“아니, 이노무 지지배가 오늘따라 왜이래? 거스름돈 가진다고 좋다며 나간 게 누군데?”'“몰라! 다신 두부 심부름 같은 거 안 해.”'“저, 저년이!”'잔뜩 부은 볼을 하고 방으로 들어온 보리는 기다랗게 세워진 전신 거울 앞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손질하지 않고, 핀 하나로 아무렇게나 대충 틀어 올린 머리와 헐렁한 박스 티에 무릎이 있는 대로 튀어나온 트레이닝 바지까지 도무지 마음에 드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보리는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짝사랑이자 첫사랑인 임성진. '어릴 적부터 같은 동네에 살았으며, 중학교까지 같이 다닌 친구 사이다. 밝고 명랑한 성격과 근사한 외모로 언제나 여학생들의 인기를 독차지한 그였다. 노골적으로 애정공세를 하는 여학생들 틈에서 그에게 들킬세라 겉으론 태연한 척, 남몰래 좋아했다.'보리가 전문대에 들어갈 때 녀석은 일류대에 진학을 하는 바람에 그녀의 마음은 더욱더 바닥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그저, 성진의 옆에서 그가 힘들 때마다 조언을 해 주며 고민을 같이 나누는 걸로 만족했다.'5년 전, 그의 가족들이 모두 호주로 이민을 가는 바람에 그 작은 기쁨마저도 잃어버리게 되었다. 성진의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에서 호주로 발령을 받은 것이다. 그 때만 해도 보리는 성진의 가족들이 모두 이민을 가게 될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성진의 집에선 가족 모두가 가는 걸로 결정을 내렸었다. 성진만은 절대로 가지 않을 거라 굳게 믿고 있던 보리가 그 소식을 듣고 깊은 절망을 맛봤음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한데, 왜 하필 오늘이냐고! 이렇게 척 보기에도 백수라고 쓰여 있는 꼬락서니일 때냐고!”'머리를 벅벅 긁어대던 보리는 울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침대에 벌렁 누웠다. 그는 여전히 잘생기고 빛났다. 하지만 그 사실이 더욱 그녀를 슬프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