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졸업식. 환한 미소를 띤 아이들 틈으로 교복을 입은 한 여자아이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그 흔한 꽃다발 하나 없었고, 그녀의 주위에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이조차 없었다. 그녀의 손에는 졸업장 하나만 달랑 들려 있을 뿐이었다.'“송인주!”'교복을 입은 남자아이 하나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 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도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교문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주위의 학생들이 흘깃거리며 훔쳐보고 있었다.'“야, 내 목소리 안 들렸어?”'빠른 속도로 달려 나온 남자아이가 인주의 앞을 가로막으며 숨을 헐떡였다. 그제야 인주는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자, 인주의 까만 눈이 드러났다. 허리까지 오는 까만 긴 생머리가 바람에 흩날렸다. 인주는 흩날리는 머리가 귀찮은지 커다란 까만 눈을 약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들렸어.”'인형같이 무표정한 얼굴. 조그마한 얼굴에 오목조목 자리 잡고 있는 예쁜 눈, 코, 입은 그녀의 외모가 무척이나 아름답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조그만 웃음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근데 왜 그냥 가고 그래? 치, 마지막인데 너무하잖아.”'“용건 없으면 이만 갈게.”'남자아이는 입을 삐죽이 내밀며 애교떨 듯 웃어 보였지만, 인주는 그런 그를 그대로 무시하고 그를 피해 몸을 튼 후, 다시 걸어갔다. 남자아이는 다시 인주의 팔을 잡아챘다.'“애들이랑 술 마시러 가는데, 같이 안 갈래?”'“바빠.”'인주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차가운 그녀의 거절에도 남자아이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웃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늘상 있는 일이었다.'“팔 좀 놔줄래?”'“아, 미안. 조심해서 가. 전화할게!”'멀어지는 인주를 향해 남자아이가 열심히 손을 흔들었지만, 그녀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걸어가고 있었다. 혼자 남겨진 남자아이를 향해 여러 명의 아이들이 뛰어왔다.'“김은호, 또 차였냐?”'“와, 정말 너무하네. 마지막까지도 저렇게 매몰차게 굴고 가냐.”'“얼굴 반반하고 공부만 잘 하면 뭐하냐? 싸가지가 저렇게 없는데. 완전 얼음이다, 얼음. 으유, 추워.”'은호의 어깨에 손을 올린 아이들이 인주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한마디씩 저마다 말을 내뱉었다. 은호는 쓴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3반? 정말이야?” '“장난 아니라니까! 몸매도 죽이고, 얼굴도 존나 예뻐!” '아이들의 소란에 창가의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책상 위에 엎드려 자고 있던 은호가 부스럭대며 머리를 들었다. 동그란 눈에 따뜻한 웃음을 가지고 있는 그는 아이들의 소란이 못내 맘에 들지 않았는지 눈을 찡그리며 머리를 긁적거렸다.'“무슨 일이야?”'하품을 하며 은호는 짝에게 말을 걸었다. 은호의 짝은 은호가 말을 걸자, 얼굴을 붉히며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이번에 3반에 전학 온 애가 그렇게 예쁜가봐. 그 여자애 얼굴 본다고 저 소란이야. 얼굴 예쁘면 단가? 내가 봤는데, 어찌나 차갑던지 완전 소름이 돋더라니까? 말 한마디 붙이기도 무서워.”'“그거 때문에 이 소란이야? 아, 짜증나.”'은호는 짜증스럽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곤히 자고 있던 단 잠을 깬 것이 못내 아쉬웠던지 은호는 쉽사리 짜증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세수라도 할까? 화장실 쪽으로 향하던 은호는 3반에 우르르 몰려 있는 남학생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맘에 안 들어, 아무튼.”'“야, 김은호!”'휘적휘적 걸어가는 은호의 어깨에 한 남학생이 뛰어오며 매달렸다. 짜증스럽게 남학생 쪽으로 눈을 돌린 은호는 이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동그란 눈이 반달 모양으로 접히는 것을 보며 남학생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알 만하다. 애들 시끄럽게 굴어서 깬 거지?”'“어. 계집애 하나 땜에 이렇게 시끄러운 거라며?”'“큭. 근데 죽여준다니까. 장난 아니야.”'“윤하 너도 이 소란에 일조를 한 모양이군. 제발 좀 조용히 살자.”'“어련하시겠어. 천하의 김은호님이.”'은호는 학교에서 꽤 인기가 있는 편이었다. 처음 은호가 입학했을 때, 신입생은 물론이고 2, 3학년들까지도 난리였다. 학교에서 가장 예쁘다는 아이가 은호에게 고백을 했을 때도 은호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거절했었다.'“원래 첫눈에 필이 꽂히는 사람을 만나야 해. 얼굴 예쁘고, 몸매 좋은 건 말짱 필요 없어. 원래 운명이라는 건 존재하는 거거든.”'생김새와 다르게 은호는 운명을 믿고 있었다. 아이들의 핀잔에도 은호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알겠다, 알겠어. 아주 귀에 못이 박히겠어. 그냥 얼굴이나 보고 갈래? 장난 아냐.”'윤하는 은호를 잡아끌었다. 얼마나 예쁘기에, 이 많은 아이들이 난리를 피우는 건지 은호도 살짝 호기심이 일었다.'“이 자식들아, 좀 비켜봐!”'윤하의 거친 고함소리에 아이들은 눈치를 보며 몸을 움직였다. 금세 지나갈 수 있는 길이 생겼다. 은호는 졌다는 듯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저기 보여? 쟤야, 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