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사악한 당신

효린의 전화를 받기 위해 회의실을 빠져나오면서 여린은 핸드백을 단단히 어깨에 걸쳤다. 여차하면 이대로 튈 작정으로.'“면접 어떻게 됐냐고? ……잘 못 봤어.” '(그래? 그럼 확실하게 떨어진 거야?)'“그렇지 뭐. 옷값도 못해서 미안해, 큰언니!)'(괜찮아. 배우 되면 우리 여린이도 돈 많이 벌 테니까 그때 언니 옷 좀 사줘. 참, 막내야! 알아봤더니 다음 주에 조연배우 오디션이 있더라. 꽤 괜찮은 역할이래.)'오디션이라는 말에 숨죽여 있던 여린의 목소리가 드디어 높아졌다. 취직 문제도 그러더니만 연예인을 만드는 일도 마구 밀어붙일 모양인데 더는 끌려 다니기 싫었다. 더 솔직한 표현은 싫은 정도가 아니라 무서웠다. '“내가 배우를 어떻게 해? 내 성격 알면서 정말 이러기야? 난 그런 거, 죽어도 못해. ……언니! 이번 면접에선 떨어졌지만, 다른 데 또 시험 볼게. 응? 그러니까 제발 나 좀 그냥 놔둬. 한 번만 봐 달라고!”'(영화배우 하라는 거, 다 널 위해서야. 카메라 앞에서 배짱을 키워야 네 그 소심한 성격도 고쳐지지. 계속 그렇게 살래?)'“그래. 이렇게 살 거다. 왜?”'(잔말 말고 마음의 준비나 해. 다음 주다?)'“언니 정말 너무…….”'여린이 전화기에 대고 처절하게 언니를 외쳐 부르는 순간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깜짝 놀라서 돌아보니 이 회사의 사장이라는 백만 싸가지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왜, 왜요?”'“너, 내 비서로 취직 됐다니까?” '여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대체 어디까지 엿들었는지, 그는 한 술 더 떠서 겁을 주었다. '“그럼 배우 할래? 그 소심한 성격으로? 베드신 찍으려면 옷도 다 벗어야 하는데? 너, 카메라 앞에서 홀딱 벗고 남자랑 비벼댈 자신 있어?”'생각만으로도 얼굴이 달아오른 여린이 전화기를 쥔 손에 힘을 바짝 주었다. 그 모습을 본 기찬이 야비하게 씩 웃더니 아예 쐐기를 박아 버렸다.'“베드신은 차라리 쉽지. 뜨려면 각종 오락프로에 나가서 얼굴에 철판 깔고 갖은 생 쇼를 다 해야 하는데, 할 수 있겠어? 게다가 확실한 스폰서를 잡으려면 흠…….”'그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서 그녀의 전신을 훑어보는 것으로 뒷말을 대신했다. 그 강도 높은 협박성 멘트에 놀랄 대로 놀란 여린은 말도 못하고 그저 눈만 덩그러니 크게 떴다. 백만 싸가지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모르지 않았던 것이다. '여린이 숨을 한번 훅 들이쉬었다 내뱉더니 전화기 속 효린에게 말했다.'“언니! 나 합격했대. 드디어 취직했어.”'(뭐? 진짜야?)'“응. 지금 막 발표됐어. 자세한 건 이따 집에서 얘기해. 끊어.”'기찬은 여린의 앞에 떡 버티고 서서 그녀가 효린에게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장단을 맞추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아주 흡족한 표정으로. 그러다 통화를 끝내자 칭찬하듯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 주기까지 하더니 고개를 한번 까딱 흔들고는 앞장섰다. '“?”'따라오라는 고갯짓 같았지만 확실치도 않고, 무엇보다 여린의 입장에선 선뜻 발걸음이 옮겨지질 않았다. 그래서 그대로 서 있으니 두 걸음 쯤 앞으로 갔던 그가 갑자기 홱 돌아서서 그녀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헉!’'줄곧 미소가 번져 있었던 그의 얼굴은 독을 품은 악마처럼 싸늘하게 변해 있었고, 느릿느릿 느물대던 목소리도 소름이 돋을 만큼 차갑기가 한이 없었다. '“빨리 안 따라오지? 꼭 말로 해야 알아들어?”'“저, 저, 전…… 그냥 집으로…….”'“난 반항하는 직원들 안 좋아해. 아주 싫어하지. 콱 밟아 버리고 싶을 정도로.”'그는 다시 고개를 까딱 흔들었다. 아까보다 더 위협적인 움직임이었다.'“어, 어디 가는 건데요?”'“사무실 구경. 네가 일할 곳은 보고 가야지. 안 그래?”

미리보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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