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에 나는 가족을 부양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직장 생활을 한 지도 벌써 2년 차. 집안 사정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워낙에 어려서부터 맏딸로서의 임무를 세뇌 받아왔던 탓일까.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자연스럽게 취업을 자청하고 나섰다. 학생 때에는 회사 생활에 대한 이미지라는 것이 드라마 주인공이 연기하던 커리어 우먼까지는 아니더라도, 설마 저런 일을 하겠어? 하며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딱가리의 운명은 아니었다. 그런데 진짜 나와 보니 서러운 것이. 이것이 사회라는 것인가? 울분을 터트리다 못해 술에 절어 사는 기간이 좀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웃긴 짓거리였지만. 아무튼 나의 인생의 전환점은 스스로의 인생을 비하하며 우울해 하던 시기에 찾아왔다. 집에서 내 신세를 한탄하기도 했지만, 건방진 남동생은 콧방귀만 뀌었고 엄마와 아버지는 그래도 너 때문에 사는 거 아니니 하시며 웃기만 하셨다. 이러니 어디 회사에서의 고충을 가족들에게 털어놓을 수가 있었을까.'그날도 회사에서 회의 자료 1,500부를 카피하느라 늦게 퇴근해서 굉장히 기분이 안 좋았었다. 동기들을 꼬여 술이라도 먹을까 하던 나를, 친구들은 벌써 눈치를 챘는지 슬금슬금 게 눈 감추듯 사라졌고 ㅡ어린것들이 남자 친구들은 하나씩 꿰어 차고 있어서 데이트하느라 바빴다ㅡ 나는 또다시 홀로 소주를 들이켜고, 외로움에 떨며 집으로 돌아왔었다.'“다녀왔습니다.”'묵묵부답. 다들 자나? 방마다 문은 닫혀 있고 아무 대답도 없는 가족들 때문에, 발소리 죽이며 들어가던 내게 마루에 걸린 시계가 보였다. 9시 30분.'“다녀왔다니까?”'뒷걸음질을 쳐 큰 방의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런데 엄마와 아버지가 다정히 로맨스 영화를 보고 계셨다.'“죄송.”'분위기 파악 못하는 딸이라는 소리는 듣기 싫어서 얼른 문을 닫고 동생 방으로 향했다.'“야, 나 왔어!”'어라? 매일 컴퓨터와 놀고 있던 동생이 없었다. 요즘 야간 자율학습도 없어서 일찍 다니는 것 같더니. 놀러 갔나. 나는 더욱 쓸쓸해져서 내 방으로 향했다. 오늘도 이리 허무하게 하루가 끝나는구나.'“낄낄낄.”'응?'“야, 간지러워. 흐흐흐. 하지 말라니까.”'내 방에서 나는 소리다. 조용히 소곤대는 저 목소리는 정녕 내 동생인데 놈이 내 방에서 무얼 한단 말인가. 그것도 음흉한 목소리로. 서, 설마!'“내 방에서 뭐 하는 수작이야?”'문을 발로 차듯 열어젖히고 현장 덮치는 형사처럼 내 방으로 들어갔다.'“누님, 오셨수?”'“헉!”'저 인간이 내 침대 위에 누워서 그것도 남정네랑 누워서 뭐 하는 짓이야. 태연하게 침대 위의 두 남자는 히죽거리며 나를 맞이했다.'“너희들, 당장 내려오지 못해!”'나는 눈에 쌍불을 켜고 흥분해서 내 예쁜 햄토리 이불을 깔고 누운 채 발톱을 정리하고 있는 두 인간을 끌어 내렸다.'“얼씨구, 이것들이 매니큐어까지 발랐어?”'두 놈 다 엄지발가락 발톱이 빨간색으로 번뜩이고 있었다.'“누나야, 왜 이제 왔어. 그동안 햄토리가 찌그러졌네. 우훼훼.”'“저것이!”'동생이 매니큐어를 들고 낄낄거리며 문틈과 내 사이를 쏙 빠져나가자, 이웃사촌이자 동생의 친구인 상민이도 아세톤과 휴지를 들고 뒤따랐다.'“상민아, 너까지 이러기냐? 응?”'“누나, 미안. 저놈 오늘 학교에서 선생님하고 한 판 해서 열 받았거든. 지금 장단에 맞춰 주지 않으면 다 피곤해지잖아.”'“뭐야 또 사고 친 거야?”'옆방에서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한 록 음악에 확하고 짜증이 밀려 올라왔다. 지가 부족한 게 뭐가 있다고. 나는 이렇게 힘들게 가족 부양하는데. 공부만 하면 되는 자기가 뭐 그리 잘났다고 매일 사고를 치며 다니는 거지? 제멋대로에, 할 말, 안 할 말 주변 사람들한테 다 하고,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음악 공부하고 싶다고 그 비싼 학원에도 자기 맘대로 계약하더니, 기타며 앰프며 악기들 사서 자기 방에 쌓아 두고. 대체 그 돈을 다 누가 감당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저놈은 저렇게 자유스럽게 사는데, 나는 왜 가고 싶은 대학도 못 가고 커피 심부름과 카피만 하면서 살아야 하는 거냐고. 게다가 왜 저런 철없는 놈한테 모든 걸 다 커버해 주는 친구가 있는 거야.'“누나.”'알코올 기운에 폭주하던 내 감정이 상민이 목소리에 퍼뜩 깼다.'“오늘 뭐 안 좋은 일 있었어? 힘들어 보인다. 아천이 조용히 시킬 테니까 예쁜 꿈꾸고 잘 자. 술 너무 많이 먹지 말고.”'살짝 문을 닫고 나가는 상민이의 말에 나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술 냄새 많이 나나?'나는 침대에 누워 야광별 붙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점점 줄어드는 옆방의 사운드 소리에 그대로 깊은 잠이 들었다. 철없는 동생에 비하면 상민이가 훨씬 이상적인 동생에 가깝다고 느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