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아무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석류찬이 나를? 에이…… 그럴 리가. 또 나를 놀리는 게 분명하다. 장난치고는 너무 스케일이 크지만. 그래도 믿을 수 없어. 또 이걸 직접 듣고자 스타제이로 걸음 한 나도 믿기지 않는다. '“전화로 얘기했으면 됐지. 그걸 굳이 확인하고자 여기까지 왔어?”'“아니죠, 그죠?”'“맞는데?”'그는 꽤 진지한 얼굴로 진지한 목소리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늘 마주쳤던 얼굴이고, 늘 마주보던 눈동자인데…… 오늘 지금만큼은 다가오는 느낌이 색다르다. 차갑고, 시렸던 것과는 다르게 포근한 느낌이랄까. 무엇보다 그의 시선이 한껏 누그러졌다. 차가운 겨울이 지나 새싹이 움트는 봄 같은 따뜻함이 묻어나 있었다.'“내 말, 진짜고 진심이야.”'아, 너무 진지해.'“너한테 관심 있는 것도 맞고, 뭐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해.”'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늘 시비 걸고, 장난스럽고, 괴팍하기 짝이 없던 그가 이렇게 순순히 변화된 모습을 보이니 당황스럽다. 그 무엇보다 지금 이 고백이 꼭 드라마에 나올 법한 대사로 들리고 있었다. '“저기…… 아저씨.”'“왜.”'“아저씨가 꽤 진지한데, 전 거짓말로 들리고, 그 말이 아저씨 대본에 있는 말로 들려요.”'진지함이 묻어나던 그의 얼굴이 살며시 일그러졌다. '“나 거짓말 할 만큼 속된 놈 아니거든?”'“…….”'“그리고 내 대본에는 이런 대사 없어. 그러니까 알아서 새겨들어.”'아, 정말인가. 진짜인가. 아직도 혼란스럽고, 머리가 복잡하게 윙윙거린다. 농담으로 들리지는 않는데, 딱히 진담으로 믿고 싶지도 않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아니, 대체 왜 나를? 늘 괴롭히고, 심부름 시키고 하도 부려먹어서 날 싫어하는 줄만 알았다. 그리고 그는 지금 내가 누구를 좋아하고 있고, 지운이와 사귀고 있다는 사실도 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 좋아한다니?'“장난 하는 거 아니죠?”'“넌 내가 사람 마음 가지고 장난 칠 나쁜 놈으로 보이냐?”'“……아뇨.”'“근데 왜 이리 사람 말을 못 믿어? 내가 그렇게 믿음이 안 가게 생겼나.”'그는 일방적으로 짜증을 내고 있었다. '“안 믿겨서 그래요.”'“너 세상 속고만 살았냐?”'“아니요.”'“그럼 대체 몇 번을 더 말해야 믿을 건데?”'석류찬의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날 응시하고 있고, 꽤 진지한 표정은 그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걸 일러주는 듯 보였지만 여전히 못 미더운 걸 어떡해.'“그냥, 모르겠어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저씨가 절 좋아할 이유가 없는 거 같아요.”'“왜 없어. 너랑 나랑 함께 있던 시간이 얼마인데,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 정도였지 않나?”'내가 그의 코디로 일하며 배우게 된 시간도 어느 덧 몇 개월이 흐르고 있었다. 그간에 석류찬과 함께 붙어 다니는 일이 많았고, 날 부려먹느라 티격태격하는 일도 잦았다. 그래서 그의 말대로 미운 정, 고운 정이 들고도 남을 정도였을 것이다. '“정이야 들었겠죠. 그런데 딱히 좋아할 이유가 없잖아요.”'“넌 유지운을 이유 붙여가며 좋아했어?”'“……아뇨. 그냥 지운이라서 좋아 한거죠.”'“나도 그래. 그냥 너라서 좋은 거야. 이유 없이 단지 너라서.”'“…….”'“그래도 못 믿겠지? 내가 백 번을 네 앞에서 좋아한다고 말해봤자 내 입만 아프지. 그러게 그냥 알고 있으라니까 왜 자꾸 말은 시켜서 사람 쪽 팔리게 만들고 그래. 이 둔탱이가.”'못 미더워하는 내 표정을 살피곤 그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혼자서 좋아한다고 고백한 것이 억울했던 모양인지 얼굴색이 붉게 물들었다. 아, 정말인가 봐. 그의 붉어진 얼굴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엄마야…… 석류찬이 정말로 날 좋아하는가 보다.'“언제부터예요?”'“정확히는 몰라. 그냥 자주 보다보니 눈에 들어오더라. 안 보면…… 보고 싶어지기도 하고.”'점점 놀라움의 연속이다. 너무도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말해버린 그의 태도가 때 묻지 않은 어린 아이처럼 순수함마저 묻어져 있다. 게다가 얼굴까지 빨개지며 쑥스러워하고 있어! 거, 거짓말 같아. 꿈만 같은 이 상황이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다.'“연기하는 거죠?”'“뭐?”'그러자 석류찬의 눈썹이 물결을 이룬다. 선했던 표정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싸하게 굳었다. 또 그의 신경을 건드린 모양이다. '“아니, 갑작스럽잖아요. 좋아한다면 표현을 해야 하는데 아저씨는 그렇지도 않았고, 그러니까 못 믿겠는 거죠…….”'“난 카메라 없으면 연기 안 해. 그리고 갑작스럽긴 뭐가 갑작스러워? 난 여태 내 마음 표현할 대로 표현했어. 그걸 네가 못 알아먹었을 뿐이야. 이 둔탱아.”'그의 손가락 하나가 내 이마를 튕겨냈다. 아야. 이마를 문지르며 멍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봤다.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눈치 챌 수도 없었고. 대체 언제……? 바지 가져오라고 시도 때도 없이 연락한 게 내가 보고 싶어서였나. 커피 심부름은 애정표현이었고? 그와 함께 지낸 시간 중에 기억을 되새겨보자면 이런 것밖에 남지 않았는데. 이 모두 다가 나를 좋아해서 한 행동이라기에는 보기 어렵잖아?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 멍한 얼굴로 그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밥 먹었냐?”'“네? 아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