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는 여전히 내 손목을 쥐고 있었다. 이제는 손목이 아니라 어깨가 아파왔다. 이미 손은 피가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픔보다 더 큰 것은 부끄러움이었다. 나는 그동안 나의 취미 생활이 부끄럽지 않았다. 하지만 차신오 씨라는 저 사람에게는 부끄러웠다. 한국사람 망신을 내가 다 시키고 있고만.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으려 고개를 내렸다. 순간 피가 통하지 않았던 손이 자유를 찾았다. 그리고 늑대의 코는 뭉개지고, 피범벅이 되었다. 차신오 씨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늑대를 향해 주먹을 쥐고 있었다. 그러더니 나의 손목을 끌고 마당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대문은 쿵하고 닫혔다. '“한여름 씨. 저와의 계약 잊으셨나요?”'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아까 늑대에게 말하던 목소리보다 더 차가워져 있었다.'“네?”'“지금 시각이 몇 시인가요?”'지금 시각은 1시. 물론 새벽 1시. 이 사람은 지금 계약의 두 번째 조항이 지켜지지 않아서 화가 났나 보다.'“죄송합니다. 제가 깜빡했네요.”'그가 아직도 화가 난 듯 먼저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그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를 향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데, 그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고, 나도 내 방으로 들어왔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저 사람 어제는 크리스털을 오늘은 그 늑대를 차례로 해결해 주었다. 뭐지. 이 두근거림은. 손목을 너무 오래 잡혀 있었나. 맥박인지 심장 소리인지 모르는 소리가 너무 크게 두근거렸다. 똑똑똑. 그가 일정한 리듬으로 노크를 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네.”'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어제 다친 상처에 연고 바르시죠.”'아까 늑대가 키스할 때 기어이 상처가 터졌나 보다. 화장도 지우지 않은 상태에서 연고를 바를 수는 없었다.'“제가 화장 지우고 바를게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내 대답에 별 말 없이 돌아서는 그의 손등에서도 피가 보였다.'“차신오 씨.”'“네?”'나는 방을 나서려는 그의 손을 잡았다.'“차신오 씨도 피가 나는데요. 본인 손을 먼저 치료하셨어야죠. 잠깐만 기다리세요. 세수만 하고 거실로 나갈게요.”'그가 거실로 나갔고, 나는 화장대에서 클렌징 오일을 꺼내서 화장을 지우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오일로 화장이 지워져서 아이라인이 판다처럼 눈 밑으로 내려왔다. 얼른 오일이 묻은 얼굴을 지우고, 폼 클렌징으로 다시 세안했다. 차가운 물이 상처에 닿았는지 아려왔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거실로 나갔다. 그가 자신의 손에 묻은 피를 닦고 있었다.'“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다치셔서요.”'“아닙니다. 왠지 속이 시원해지던 걸요.”'그가 멋쩍은 듯, 한 손으로 머리를 긁적거리며 웃었다. 나는 그의 손을 내 쪽으로 잡아끌었다. 아직 그가 다 닦지 못한 피를 알코올 솜으로 닦아냈다. 그리고 그의 상처에 연고를 발랐다. 손에 연고를 묻힌 김에 내 뺨에 난 상처에도 연고를 바르려 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이라 잘못 발랐나 보다. 그가 손가락에 연고를 덜더니 내 상처에 발라 주었다.'“누가 보면 우리끼리 싸운 줄 알겠어요.”'내 말에 그가 웃었다.'“그러게요. 제가 그럼 여름 씨를 때린 사람이 되는 건가요?”'그가 나를 한여름 씨가 아닌 여름 씨라고 불렀다. 그렇게 불리는 게 기분이 좋았다.'“아니요. 제가 얼굴로 신오 씨 손을 때렸어요.”'그가 더 크게 웃었다. 왠지 그 웃음소리가 좋아서 나도 따라서 웃게 되었다.'“맥주 한잔하실래요?”'“네. 좋아요.”'나는 냉장고에 넣어 두었던 맥주를 두 캔 꺼냈다. 그에게 하나를 건네고 거실에 다시 앉았다. 목에 넘어오는 맥주가 시원했다. 그의 목에도 맥주가 넘어갔다. 그의 목젖이 출렁거렸다. 보려고 한 것은 아닌데, 왠지 그 모습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열어 놓은 베란다 문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바람이 시원하게 머리카락을 스쳤다. '“한여름 씨는 여름에 태어나셨나요?”'대부분 사람들이 내 이름을 들으면 물어보는 질문이다. '“네. 그것도 한여름이라고 하는 음력 7월 7일이요. 칠석이라고 일본에도 있나요?”'“네. 일본은 양력으로 7월 7일이에요. 그러니까 한국과 날짜는 다르지만요.”'내 생일은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칠석이었다. 우리 세대의 생일은 주로 양력이었지만, 우리 부모님은 내 생일이 칠석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드셨는지, 내 생일은 음력으로 챙기게 되었다.'“그럼 견우와 직녀 이야기가 일본에도 있나요?”'“네. 왠지 슬프지 않나요?”'일 년에 단 하루만 만날 수 있는 사랑. 하지만 단 하루라도 만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가. 그 하루만으로 나머지 364일을 살 수 있다.'“슬프지만 부러워요. 그래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으니까요.”'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눈앞에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마음에 있는 말을 꺼내기 전에 일어섰다. '“신오 씨 안녕히 주무세요.”'“네. 여름 씨도 안녕히 주무세요.”'내 방으로 들어와 옷을 갈아입고 다시 누웠다. 아까 그 사람에게 왜 그런 말을 꺼냈을까. 만날 수도 없는 3년 전에 떠나 버린 그 사람 이야기를 할 뻔했다. 그도 우리 부모님처럼 내 생일을 좋아했다. 자신은 견우고 나는 직녀라고 하면서. 하지만 그는 견우가 아니었다. 칠석에 사라져 버렸으니. 그의 얼굴이 이제는 제대로 생각나지도 않는다. 하지만 자꾸 그를 생각하려는 머리를 흔들고,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썼다.'시끄럽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다. 어제 그 상태로 잠이 들었나 보다. 이불을 젖히고 일어났다. 책상에 올려놓은 휴대전화에 손을 뻗었다. 잡지사 에디터의 전화였다.'“여보세요.”'“네, 여름 씨. 김영희 에디터예요. 오늘 잡지사로 나오라는 편집장님 말씀을 전하려고요.”'왜 또 편집장의 호출인가. 지난 번 전화로는 부족했나 보다.'“네. 언제까지 가면 돼요?”'“점심 함께하고 싶다고 점심때에 맞춰 오시면 된대요.”'“네. 그때 뵙겠습니다.”'편집장이 닦달하기 전에 소재를 좀 찾아가면 좋을 텐데.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난다. 어제 맥주를 마셨더니 목이 마르다. 화장대 위의 머리끈에 손을 뻗어 머리를 하나로 묶고 거실로 나갔다. 그가 싱크대 앞에서 무슨 요리를 하고 있었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며 그의 등에게 말했다.'“아침에 일찍 일어나시네요.”'“네. 아침 식사하세요.”'“네?”'빌어먹을 네 번째 조항. 나는 아침을 먹지 않는다. 더구나 밥은 싫다. 그런데 이 사람 아침부터 정갈하게 된장국에 생선까지 구웠다. 이러면 나도 아침에 일어나 밥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저기요. 신오 씨, 저는 아침은 원래 안 먹어서요. 그리고 아침잠이 많아요. 오늘은 회사에 나가 봐야 해서 일찍 일어난 건데요. 이런 일은 정말 가뭄에 콩 나듯 일어나는 거고요. 그러니까 더구나 아침밥을 만드는 일은 불가능해요.”'그가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는 나를 보며 웃었다.'“괜찮아요. 아침 당번은 제가 계속할 거니까요. 그 대신 밥만 같이 먹어 줘요.”'왜 자신이 아침을 만들면서까지 밥을 같이 먹자는 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왜요? 왜 같이 밥을 먹기를 원하시는 데요?”'“이유는 없어요. 그냥요. 다만 계약 사항이니까 지켜줘요.”'이유도 말하지 않고 무조건 계약 사항으로 밀어붙이겠다는 이 사람은 내게 알 듯 말 듯 한 미소만 지었다. 도대체 이 사람 정체가 뭐야? 그래, 내가 밥 먹어 준다고. 그 계약 조건 내가 지킨다. 지켜. 그가 국그릇을 식탁에 내려놓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식탁 의자에 앉았다. 그도 내 맞은편에 앉더니 얼굴 앞에 손을 모으고 말했다.'“잘 먹겠습니다.”'“저도 잘 먹겠습니다.”'그가 만든 된장국은 맑았다. 이런 걸 일본식 미소 시로라고 해야 하나. 숟가락을 들어 한 입 떠서 입 안으로 넣었다. 맑은 된장국은 시원했다. 그가 지은 밥에도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요리를 잘하시네요.”'“아, 입에 맞으세요? 제가 혼자 오래 살았거든요.”'나도 혼자 오래 살았지만, 요리 실력은 절대로 혼자 산다고 해서 느는 게 아니다. 점점 눈앞의 이 사람이 궁금해진다. 나이는 서른하나, 재일 교포 3세, 전직 의사, 그리고 싸움과 요리를 잘하는 이 사람. 그리고 1억이라는 돈을 투자하고 겨우 원했다는 것이 우리 집에 홈스테이를 하는 것. 알면 알수록 신기한 양파 같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