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로비스트 1권

붉은 나무로 된 낮은 칸막이 저편에 앉은 검은 머리의 여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다. 의회 도서관(The Library of Congress)에 자료를 찾거나 책을 읽고 있는 부류들과는 극명하게 갈리는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넓은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굳이 인공적인 조명이 없이도 책을 읽기 불편함이 없는 실내. 그런데 선글라스까지 끼고 그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여자라……. '신경이 미세하게 긁히는 느낌이다.'“excuse me!”'살짝 어깨가 닿았을 뿐인데 미국인 특유의 습관처럼 바로 내뱉는 사과의 말에 그는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No problem.”'들릴 듯 말 듯 저음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어깨를 부딪친 학생인 듯 보이는 남자가 책상을 스치고 지나갔다. 스테인드글라스로 된 천장 밑으로 은은한 빛이 투과되고 있는 평화로운 도서관, 하지만 그는 이미 고개를 돌리고 책장을 넘기는 여자를 예리한 눈초리로 시종일관 주시했다.'직감이 말한다. 뭔가 께름칙하다고.'「제이슨.」'작지도 크지도 않은 목소리에 그의 눈이 깜빡였다. 미세한 움직임이었지만 곧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부르는 음성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밝은 베이지색의 양복을 입은 남자는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으며 서양인 특유의 반갑다는 과장된 몸짓을 했다. 금발이 썩 잘 어울리는 푸른 눈동자를 마주하며 그는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상원의원인 마크 윌리엄. 신분제도가 철폐되고, 만인이 평등하다고 외치는 세상에 살고 있다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마크 윌리엄이 말해주는 것 같다.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고 집안의 인맥으로 정계에 입문해 권력과 부를 모두 누리는 부류……. '제이슨은 그와는 태생부터 차원이 다른 마크 윌리엄의 손을 맞잡았다. 온기가 전해오는 손을 부드럽게 맞잡고 가볍게 흔들었다.'「많이 기다렸죠? 의원총회가 좀 길어졌어요. 합참 작전차장과 국방부 정책담당 차관보의 증언이 길어져서…….」'제이슨은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예의 웃음 띤 표정을 지었다. 사투리가 섞이지 않은 영국식 억양을 들으며 문득 고개를 돌린 순간,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창가 햇살이 비치던 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불과 1분여 만에.'「제이슨, 왜 그러죠?」'「아닙니다.」'급하게 표정을 수습하고 태연하게 대답을 하자, 마크 윌리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그럼 나갈까요?」'「그러시죠.」'윌리엄 상원의원 역시 이곳이 불편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권했다. 사람의 인적이 많은 곳이라 은밀한 얘기를 나누기에는 불편한 감도 없지 않았다. 합법적으로 로비를 인정하는 거대한 땅덩어리 미국일지라도 정치인과 로비스트와의 대면을 흔쾌한 시선으로 봐주는 것은 무리였다.'양부와의 소개로 몇 번의 만남을 가졌기에 제이슨은 윌리엄의 말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도서관을 나서는 그의 뒤를 따랐다. 뭔가 개운치 않은 느낌, 뒷머리를 쭈뼛 당기는 느낌을 애써 뿌리치며 화강암의 건물을 나왔다. 청동색의 가로등을 지나 길지 않은 계단을 중간쯤 내려왔을까.'“송주연!”'한국어였다. '짧은 머리의 남자가 급하게 계단을 내려가며 누군가를 큰 소리로 외쳐 불렀다. 이제는 거의 잊어버렸다고 생각한 언어, 하지만 듣자마자 귀에 쏙 감겨 들어오는 모국어.'제이슨은 인상을 찌푸렸다. 고국이라는 단어에 반감을 가질 정도로 제 위치에 대한 불만은 없었다. 그렇다고 애정 따위를 가질 존재도 아니었다. 이익과 연결되면 어떤 태도로 돌변할지는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애증의 감정이 뒤섞인 혼란스러운 언어이고, 국가였다.'「제이슨도 한국인이라고 했나요?」'한국인?'부모에게 버림받고 국가에서도 버림받은 존재, 해외 입양아. 굳이 고국이라는 말을 끄집어내기가 불편해 고개만 살짝 움직였다.'「그럼 내 얘기에 구미가 당길 수도 있겠군요.」'「흥미로운 일이라도 있나 보군요?」'「아마도.」'음흉한 미소를 끝으로 마크 윌리엄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역시 가볍게 넘길 사항이 아닌 것 같아 입술을 꾹 닫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송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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