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조명. 테이블 위에는 두 개의 양초가 불빛을 내며 사르륵 타내려가고 있었다. 예랑은 그 앞에 앉아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어린아이가 기도를 하는 것 같은 자세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에 도착한 지도 10분이 넘어서고 있는데 어째서 그 인간은 안 오는 것일까. '“짜증나, 정말.”'“짜증나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제가 좀 늦었죠.”'화들짝 놀란 예랑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자신의 혼잣말에 기다렸다는 듯 대꾸하는 저 남자. 정말이지 너무 싫다.'“왜 이렇게 늦게 오신 거예요? 분명히 나랑……비슷하게 출발했을 텐데.”“무슨 말씀이신지?”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던 예랑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봤잖아요, 아까.”'“…….”'“못 봤다고 시치미 떼는 거예요?”'“……아. 신성한 회사 안에서 남자랑 끌어안고 있었던 그 여자가, 혹시 김예랑 씨였어요?”'예랑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양초를 집어 들어 그의 머리 위로 세게 내리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허점을 보여서 자신이 기세등등하다고 느끼나 본데 이 남자.'“절 마음에 들어 하셨다던 분이 어째서 남자와 그러고 있었는지 이해는 가지 않지만.”'“누가 마음에 들어 해요, 누가!”'버럭 소리를 내질러 버린 예랑 덕분에 주위의 시선은 두 사람에게 확 쏠리고 말았다. BAR안에 흐르고 있던 잔잔한 클래식은 어느덧 흥겨운 팝으로 교체되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두 사람의 알 수 없는 싸움이 오래갈 것이라 여겼던 직원이 음악을 바꾸어 틀어 놓았나 보다. '“김예랑 씨. 어제 사랑하는 사람 있다고 분명히 선포하고 가셨으니까 오늘 일은 그다지 놀랍지 않아요. 혹시, 부끄러워서 그래요?”'“됐어요. 그 일에 대해선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으니까 오늘 이 자리에서 확실히 결론 내요. 이번만큼은 저희 엄마,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쪽 만나 보래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난 그쪽 절대로 마음에 들지 않아요.”'“뭐, 그건 나도 마찬가집니다.”'“다행이네요. 서로 편해질 방법은 찾는 게 어때요?”'현재는 지금 이 여자가 무슨 소릴 하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편해질 방법이라니.'“그쪽 안 만난다고 하면.”'“그쪽이 아니라 제 이름은 서현재입니다. 서. 현. 재.”'“아무렇게나 부르면 어때요? 까다롭기는……어쨌건 서현재 씨, 나나 서현재 씨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서현재 씨 집에선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 엄마는 삼 개월만 만나 보래요. 그래도 싫으면 그땐 내 마음대로 하라고.”'아하. 이제야 알겠군. 현재는 한쪽 입 꼬리를 치켜 올리며 피식 웃었다. 얼굴 가득 굉장히 심각하기에 어떤 제안인가 했더니.'“그래서, 설마 삼 개월만 만나 보자, 이런 겁니까?”“삼 개월 만요. 딱 삼 개월만. 그래야 내가 자유로워질 수 있어요.”'삼 개월이라. 그녀의 제안은 나름대로 괜찮았다. 어차피 현재도 큰어머님의 말씀을 거역하기는 싫었기에 80%는 예랑의 제안에 따라 볼까 생각이 들었다. 그녀 말대로 삼 개월만 만나는 척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고 말씀드리면 큰아버님, 큰어머님 역시 포기하실지도 모른다. 그 후엔 소영과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다. '“이봐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오래,”'예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현재는 테이블 구석에 놓여져 있는 그녀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예랑이 무슨 짓이냐며 팔을 뻗어 빼앗으려 했지만 그는 뒤로 몸을 살짝 젖히고 버튼을 재빠르게 눌러대었다. '“자요, 여기.”'“뭐 한 거예요?”'“내 휴대폰 번호예요. 다음 데이트는 어디에서 할지 고민해 보고 전화 줘요.”''예랑을 만나러 간 곳은 회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공원이었다. 저녁이 되면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끊기는 곳이라 가로등만이 현재를 반겨 주고 있었다. 반쯤 타 버린 담배를 꺼 버리고 백조 모양의 석상이 세워져 있는 분수대 앞으로 거의 다 도착할 때쯤이었다.퍽!갑자기 딱딱한 무언가가 현재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듯 내리꽂았다.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앞으로 반쯤 고꾸라지듯 허리를 굽힌 현재는 찡한 통증을 느끼며 뒤를 돌아보았다. 예랑이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씩씩거리며 까만 핸드백을 다시 들어 올렸다.'“자, 잠깐! 왜 이래요!”'“똑같이 만들어 줄 거야! 윤창 씨를 그렇게 만들어 놓고도 살아남을 줄 알았어요!”'회장실로 올라갈 때의 느껴졌던 얼얼했던 한기는 바로 이것을 예고했던 것일까. 현재는 또다시 핸드백을 내려치는 예랑을 피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윤창 씨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사람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놔요! 당신 제정신이예요!”'현재가 보기엔 앞에서 핸드백으로 살인이라도 저지를 것처럼 행동하는 예랑이 오히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보였다. 겨우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가 양팔로 그녀의 손을 꽉 붙들어 잡았다.'“그렇다고 무작정 때리면 어떡해요! 내 얘기도 들어 봐야죠!”'“그러는 당신은 윤창 씨를 아무 이유 없이 때렸잖아요!”'“이유가 있으니까 때렸죠!”'“그 이유가 뭐예요! 뭐냔 말이야!”'퍽!'이번에는 그녀의 뾰족한 하이힐이 그의 정강이에 정통으로 꽂히고 말았다. 현재는 상상할 수 없는 아픔에 그만 한쪽 무릎을 꿇었다. 물론 그녀의 양팔은 그의 손에 여전히 붙들려 있는 상태였다.'“윤창 씨 병원에 있는 거 몰라요? 어쩜 사람이 그래요……찾아가서 잘못했다고 해야죠.”'예랑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려오고 있었다. 현재는 정강이 부분이 굉장히 얼얼했지만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독기를 품고 자기를 죽이려고 달려들었던 그녀의 눈이 어느새 원망 가득한 눈빛으로 변해 있었다. 현재는 흡연실에서 있었던 윤창의 전화 통화 내용을 떠올리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 사람 사랑해요?”'“뭐라구요?”'“정말 사랑하냐구요. 세상 끝까지 놓치지 않고 따라갈 각오했냐구요.”'예랑은 한 번 더 그의 정강이를 걷어차려다가 관두기로 했다. 여기까지 와서 그 이유를 듣고자 한 자신도 참 바보 같다고 느끼며 그에게 붙잡혀 있던 손을 세게 뿌리쳤다.'“할 말 없으니까 딴 소리로 돌리려 하지 말아요. 정말 서현재 씨 그런 사람으로 안 봤는데 정말 이상한 사람이네요. 나한테 감정 있으면 나한테 풀어야지 왜 아무 죄 없는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 놔요? 얼마나 유치한지 알아요?”'“김예랑 씨, 나 그렇게 유치한 짓할 정도로 한가한 사람 아닙니다. 남자 친구에게 직접 가서 물어봐도 내가 왜 그랬는지 대답도 못할 거예요.”'“……서현재 씨……재밌어요? 사람 갖고 노는 게 재밌어요?”'“하나도 재밌지 않아요. 김예랑 씨 남자 친구가 다른 여자 숨겨 놓고 만나면서 당신한테 연락 오는 것조차 귀찮아하는 걸 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야 한다는 거, 솔직히 짜증나요. 알아요?”'현재도 참을 만큼 참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흥분하면서 달려들지 않아도 제대로 얘기를 해 주려고 했다. 하지만 사람을 사이코로 취급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기분 더러웠다. 화가 나서 직선적으로 내뱉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그녀는 더더욱 기가 막힌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눈앞에 보이는 그녀의 표정이 어이상실이라고 말해 주고 있으니까.'“……뭐라구요? 다시 한 번 말해 봐요.”'“당신, 지금까지 완벽하게 속고 있었어. 여자들은 자기 남자에게 다른 여자가 생기면 직감으로 단번에 알아챈다던데 왜 몰랐을까?”'“…….”'“그런데, 이제 알겠어. 어째서 당신 남자 친구가 당신 놔두고 바람을 피우는지. 무조건 좋다고 쫓아다니면 남자 쪽에서도 질리기 마련.”'현재의 말이 끝나기 전에 예랑의 손바닥이 그의 오른쪽 뺨을 세게 내리쳤다. 현재의 입 꼬리가 슬쩍 올라가며 그녀를 노려보듯 쳐다보았다. 예랑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건드리면 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정말 못됐다……서현재 씨 정말 잔인해.”'“…….”'“다시는 보지 말아요. 우리가 했던 약속도, 오늘로 끝이니까. 당신 같은 사람……죽어 버렸으면 좋겠어.”'예랑의 눈에서 참고 있었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말았다. 매몰차게 뒤돌아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현재는 화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정강이에 이어 뺨도 얼얼했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까지 꽁꽁 얼어 버린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