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혁의 얼굴이 어둡게 굳어 있었지만. 지원은 아이 소식을 전할 들뜬 기분에 느끼지 못하고 주혁의 곁으로 다가갔다. 주혁은 서류와 사진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는 책상을 등진 채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곧장 주혁의 곁으로 다가간 지원은 주혁의 허리를 껴안으려 했다. 하지만, 주혁은 그런 지원의 손길을 피했다. 지원이 뭔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주혁 씨.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알죠? 주혁 씨도 나랑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해요.”'뒤돌아선 채 지원을 보지 않고 듣고 있던 주혁이 차갑게 이야기했다.'“본론만 이야기해.”'유독 냉정하게 이야기하는 그의 말에 지원은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저… 나 임신이래요. 방금 병원에서 확인하고 오는 길이에요.”'지원의 말을 들은 주혁이 놀라면 뒤돌아섰다. 지원을 혼란스럽다는 듯 쳐다보았지만, 곧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나 너무 떨려요. 아직 실감이 나지 않고 어리둥절…….”'지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혁이 지원의 뺨을 힘껏 내리쳤다'찰싹.'“꺅.” '쿵.'지원은 갑작스러운 손찌검에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뺨을 감싸고 놀란 눈으로 주혁을 쳐다보았다. 쓰러지는 지원을 무심한 얼굴로 쳐다보던 주혁이 지원에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임신? 임신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로 생각했나? 처음부터 이럴 의도로 나에게 접근한 건가? 순진한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 가증스러운 얼굴로 날 유혹하고 뒤에서 이런 짓을 벌리다니. 처음부터 모든 일을 계획적으로 벌렸군. 치밀하게 말이지.”'“…….”'“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였나? 이 강주혁이 그렇게 쉽게 보였단 말이지.”'지원은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은 단지 아이 소식을 전하러 왔을 뿐인데 주혁이 왜 저렇게 흥분을 한 것인지, 왜 손찌검을 당한 것인지, 왜 저런 역겹고 더럽다는 듯의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알 수 없었다. 맞은 뺨은 벌겋게 손자국이 나고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왜 이러는 거예요.”'지원의 눈시울에 눈물이 글썽거리는 모습을 본 주혁은 더욱더 화를 내며 서류 더미를 던지기 시작했다. 지원의 앞에 서류와 사진들이 여기저기 흩어졌다. 지원은 자신의 앞에 떨어진 서류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생각이란 것을 할 수가 없었다. 숨이 턱턱 막히고 몸이 덜덜 떨려 왔다. '“임신이라. 그 잘나신 몸뚱이로 임신하셨다. 하! 뱃속에 든 아이가 내 아이라고 말하다니 뻔뻔하군. 어떤 놈의 몸뚱이 밑에서 또 순진한 척하며 꼬여 된 모양인데 잘못 생각한 거야. 설사 그 아이가 내 아이라고 해도 네 배 빌려서 난 아이라면 난 사양하겠어.”'“…….”'부어오르는 뺨을 감싼 채 하얗게 질려 있는 지원을 보고 주혁은 더욱더 잔인하게 지원에게 말했다. 지원은 주혁의 잔인한 말을 듣고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이. 그렇군. 아이가 문제였던 것이다. 주혁은 아이를 바라지 않았다. 허탈했다. 몸에서 뭔가가 쫙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친구들의 말이 맞았던 것이다. 자신이 주혁과 사귄다고 했을 때 수민을 제외한 친구들이 시기 어린 말들을 했었다. 그런 부자가 뭐가 아쉬워서 너랑 연애 하겠느냐는 둥, 잠깐 가지고 놀려고 하는 것이라는 둥, 절대 같이 자지 말라 자고 나면 버림받을 것이라는 둥… 그런데 그것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심장이 갈가리 찢겨 버렸다. 비록 사랑한다고 한 번도 이야기해준 적은 없었지만, 지원은 주혁이 자신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주혁은 넋이 나간 듯 쓰러져 있는 지원을 보고 날카롭게 쏘아붙였다.'“아이 지우도록 해! 이런 일까지 벌인 걸 보니 아이를 빌미 삼아 한몫 단단히 잡아보겠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잘못 생각한 거야. 내가 두 번이나 호락호락하게 당할 거로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야. 뭐 그동안의 정을 봐서 병원에 강제로 데려가진 않겠어. 그렇다고 나 몰래 숨어서 낳아놓고 친자소송 같은 것 할 생각 추호도 하지 마. 너랑 더는 엮이기 싫으니깐 다른 것들도 여기서 더는 묻지 않고 덮도록 하지. 두 번 다시 내 눈앞에 띄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눈에 띈다면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지옥인지 알게 될 거야.” '“…….”'지원은 믿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모질고 잔인한 사람이었던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너무나 소중하다는 듯이 자신을 대했던 그가 아닌가. 다른 사람 같았다. 자신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강주혁이 아닌 것 같았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것이 아니라고, 이러지 말라고, 무슨 일이냐고 말해야 하지만 누군가 자신의 입을 막고 있는 듯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주혁은 그런 지원을 내버려둔 채 인터폰을 눌렀다.'“김 비서! 내 방에 있는 물건 치워.”'김 비서가 들어와 잠깐 놀라더니 곧 지원을 부축하러 다가왔다.'“앞으로 볼 일 없는 물건이니깐. 다신 내방에 아니 회사 건물로 들이지 말라고 로비에 이야기해.”'김 비서가 부축하자 지원이 일어서려고 다리에 힘을 줬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서다 다시 주저앉아버렸다. 그런 지원을 김 비서가 다시 부축해 방을 나왔다. 지원은 방을 나오며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입술을 꼭 깨물었다. 여기서 눈물을 흘리면 정말 비참해 질 것이다. 오로지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떻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까지 내려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건물을 나서는데 차가운 바람이 온몸을 스쳐 지나갔다. 참았던 눈물이 흘렀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소리 없이 눈물만 처량하게 흘렀다. 자신에게 닥친 일들이 믿어지지 않았다. 지금의 이 잔인한 시간이 그저 꿈인 것만 같았다. 건물입구에서 뺨이 벌겋게 부은 채 눈물을 흘리는 지원을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갑작스러운 통증이 온몸을 스쳐 지나갔다. 지원은 배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아! 안 돼.”'초겨울의 싸늘한 바람에 지원의 절규가 묻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