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쯤이야?”'나정은 약속 상대를 기다리다 어느새 다 비어 버린 커피 잔을 만지작거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벌써 약속 시간에서 40분이 지나자, 제아무리 천사님 같은 그녀라도 슬슬 지루해지고 심통이 나기 시작했다. '“십 분? 알았어. 그럼 4층 서점으로 와. 나 커피도 다 마셨고 계속 있기 눈치 보여.” '통화를 끝낸 나정은 커피숍을 빠져나와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실었다. 그나마 약속 장소가 백화점이라 아이 쇼핑도 할 겸 시간 때우기가 괜찮아 다행이지, 길거리 한복판에서 보기로 했으면 다리깨나 고생했을 터였다. '백화점 내 6층 커피숍에서 4층으로 내려온 나정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서점 입구에 크게 걸려 있는 노란 현수막으로 시선이 향했다.'[2009년 최고의 화제작! ‘바보라서 미안해’ 차정우 작가 팬 사인회!] '현수막을 읽어 내려가는 나정의 동공이 크게 열렸다.'“4월 11일 일요일 오후 1시…….”'작게 중얼거린 나정은 재빨리 날짜 계산을 해보았다.'4월 11일이면 앞으로 2주가 남았다. 딱 2주 후면 차정우 작가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그간 철저히 베일에 싸여 얼굴 노출을 하지 않았던 점을 생각한다면 이건 로또 당첨이나 마찬가지였다.'기필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날은 차정우 작가 팬 사인회에 참여해야겠다고 다짐한 나정은, 설레는 마음을 안고 서점 안으로 들어섰다. 입구 바로 앞에 마련된 베스트셀러 칸엔 차정우 작가의 책이 장악하고 있었고, 사람들의 손에도 그의 책이 한 권씩은 쥐어져 있었다. 베스트셀러가 괜히 베스트셀러는 아니라는 걸 입증해주고 있는 셈이었다.'사람들 틈으로 끼어든 나정은 깔끔한 하얀색 표지의 책을 한 권 집어 들었다. 이미 책을 소장하고 있긴 했지만, 반복해서 너무 읽다 보니 벌써 손때가 묻어 꼭 헌책 같았기 때문이다. 차정우 작가 친필 사인을 받을 수 있는 기회인데 이왕이면 반질반질한 새 책에다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어여쁜 이름 석 자를 두고도 저능아라 불리는 사람.'낯선 이들의 이질적인 시선이 익숙해져 버린 사람.'일곱 살배기 동네 아이들과 함께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사람.'바보라서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이는 사람.'그런 그녀를 향해 사실은 내가 해줄 말이 있었다. '바보라서 미안한 건, 나와, 우리들, 이 세상이라고.''책 뒤표지 카피를 읽던 나정은 또다시 그때의 감동이 몰려와 눈시울을 붉혔다. 앉은 자리에서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할 정도로 몰입하며 읽어버렸던 책의 여운이 얼마나 강한지, 한동안 아무 일도 못한 채 멍청하게 보내버린 나날들이 떠올랐다. '서른 살의 평범한 한 남자가, 열 살이나 차이 나는 스무 살의 지적장애 여자를 만나 겪게 되는 일들을 현실적으로 써내려간 글이었다. 너무나 현실적이라 더 추악하고, 잔인하고, 가슴 아프던.'장애인을 바라보는 우리네들의 그릇된 시선을, 저자는 강진후라는 인물을 통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갈수록 어려워지는 출판시장에서 출간 3개월 만에 30만 부, 6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난 현재는 영화로 제작된다는 언론 홍보와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며 100만 부라는 경이적인 판매 부수를 올려, 명실 공히 국내 최고의 대중문학작가 반열에 올랐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일부에선 순수문학과 비교해가며 대중을 독자로 잡기 위한 흥미 위주로 창작된 저급한 대중소설일 뿐이라고 맹렬한 비판도 따랐다. 그럼에도 ‘바보라서 미안해’의 인기몰이는 그칠 줄을 몰랐고, 오히려 저급하다 표현되는 모든 요소들을 갖고 있으면서도,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신파적이고 통속적인 스토리를 가지고도, 작품성에서 인정을 받고 있었다. 차정우 작가의 탄탄한 필력 덕분에 많은 독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는 평가였다. '“후아. 기대된다. 차 작가님을 직접 뵙게 되는 날이 오다니. 분명 굉장히 따뜻하시고 다정다감한 분이실 거야.”'책을 가슴팍에 꼭 안은 채 발길을 돌린 나정은, 베스트셀러 코너와는 달리 한쪽 끝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는 로맨스소설 코너 쪽으로 향했다.'<우리가 사랑할 때.>'책 표지를 어루만지는 나정의 입매가 살포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