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다. 그녀가 이 집을 떠나는 날이……. '3년 이란 시한을 그는 정확하게 지켰다. 해인은 얼마 되지 않는 자신의 짐을 작은 여행 가방 두 개에 챙겨 넣었다. 3년 전 이 집에 들어 올 때 가지고 왔던 그 짐 그대로였다. 그리고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던 결혼반지를 빼서 케이스에 넣었다. 그가 그녀에게 해 준 모든 패물은 패물함에 얌전히 넣어 놓았고 그가 사준 이른 바 명품이라 일컬어지는 상표가 부착된 화려하기도 하고 단정하기도 한 옷들, 그리고 그 옷들에 맞춰진 구두와 속옷에 이르기까지 모두 깨끗하게 세탁과 손질을 해서 옷장에 걸어 놓았고 신발장에 넣어 두었다. 버리는 건 그녀의 몫이 아니었다. 그가 알아서 할 일이지. '얼마 걸리지 않을 것 같던 정리가 생각보다 시간이 좀 더 오래 걸려서인지 해인의 이마에 구슬 같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옷 방에 들어가 자신의 옷장을 정리하고 나서 마주하고 있는 그의 옷장도 정리했다. 지난 3년간 해인의 손때가 고스란히 묻어 있는 곳이다. 그는 별로 신경도 안 썼겠지만. 그의 액세서리들을 넣어 두는 작은 서랍들을 열어 넥타이핀과 커프스 버튼을 일일이 정리해 두고 손수건도 색깔 별로 정리해서 넣어 두었다. 바로 아래 속옷 서랍을 열어 잘 정리가 되어 있는지 확인을 했고 양말도 잘 개켜져 있는지 본 뒤 서랍을 닫고 정리를 끝냈다. '“이제 정말로 끝인 거야, 아니 이제 시작이라는 게 맞겠지.”'화장대 앞에 앉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렇게 자신에게 얘기하고 있었다.'화장대 거울에 비춰진 모습은 3년 전의 그녀는 없었다. 밝고 명랑했던 소녀의 모습은 사라지고 이제는 성숙미를 물씬 풍겨내는 여인이 되어 있었다.' '3년 전.' '해인은 명랑 쾌활한 그 나이에 들어맞는 대학 2년생이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엄마가 작은 화장품 가게를 운영하며 단둘이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여유 속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모녀의 행복은 해인이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에 무난히 들어 간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느 날부터 엄마가 자꾸 아프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엔 단순히 생리통이 심해서 아픈 거라고 엄마는 생각했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찾아간 동네 개인 산부인과에서 자궁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엄마와 해인은 오진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서둘러 큰 병원을 찾았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그곳에서도 똑같은 진단이 내려졌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대학병원에서는 초기가 아닌 진행이 많이 되어 버린 자궁암 말기 진단이 내려졌다. 두 모녀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그때가 해인이 대학 1학년 겨울방학이 시작되기 바로 전이었다. 하지만 해인은 힘들어 하며 울기만 하는 엄마를 설득해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힘들지 않게 살았던 해인의 집안 형편은 점점 기울어 가기 시작했다. 병원비에 비싼 항암제…… 그로 인해 줄어들어만 가는 통장잔고는 해인의 여린 어깨를 더욱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길고 긴 엄마의 투병 생활은 두 모녀의 단란하고 행복했던 삶을 결국은 피폐하게 만들어 가고 있었다. 해인의 엄마는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더니 결국엔 아예 병원에 장기 입원 환자로 등록 되었다. 어쩔 수 없이 해인은 그런 엄마를 돌보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결심이 흔들리기 전에 자퇴서를 내기 위해 학교에 갔다. 그리고 먼저 자신을 많이 아껴 준 지도 교수 김인영에게 인사를 드리러 갔었다. 그게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그를 처음 보았다. 아니 보았다는 표현보단 그저 스쳐 지나갔다는 것이 옳다. 그때는 그가 누군지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의 인생에 그가 이렇게 크게 영향을 끼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해인아, 자퇴서는 나중에 내고 지금은 휴학계만 내 두면 어떻겠니?”'“어차피 끝마치지 못할 건데 미련 남기고 싶지 않아서요, 죄송해요. 교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