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다경 씨, 왔으면 빨리 들어올 것이지, 거기서 뭐해요?”'“네?”'다경이 놀라서 쳐다보자 젊은 여자가 빨리 안 올라오고 뭐하냐는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오늘부터 일하기로 했다면서요. 아까 소개소 소장님 전화 받았어요. 지금 올라온다고 하더군요. 빨리 와요. 우리 가게 지금 아가씨들이 모자라서 일손이 많이 딸려요.”'미리 전화까지 해 놓은 거야? 평소의 강 반장답지 않은 주도면밀함에 다경이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일손이 딸린다고, 그래서 빨리 오라고. 이건 면접이고 뭐고 바로 현장에 투입될 기세에 다경의 머릿속이 아득했다. 어떻게든 면접에서 떨어뜨려 주길 내심 바라고 있었는데.'“빨리 와요. 저녁 시간에 배달 밀리니까.”'‘아무리 변두리 허름한 다방이지만 면접은 봐야 되는 거 아냐.’'속으로 소리를 쳤지만 이미 다경의 발걸음은 다방 안을 향하고 있었다. 역시 허접한 출입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다경이 예상했던 것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영화나 드라마에서 가끔 나오던 전형적인 시골 촌구석 다방과 너무도 흡사한 인테리어. 아무리 도심 변두리라지만……. 홀 중앙에 앉아 담배를 뻐끔 피고 있는 어르신들까지.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저, 그런데 오늘부터 저 일하는 거 맞나요?”'혹시나 하고 다경이 여자에게 묻자 젊은 여자가 다경을 아래위로 한 번 훑으며 대답했다.'“방금 전화 받았어요. 소장님께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다경 씨 칭찬을 하셔서 믿고 쓰는 거죠. 신분도 확실하고 얼굴도 그런대로 예쁘네요. 그리고 나이보다 성숙해 보이는 게 좋네요. 바로 일을 시작하죠.”'“그래도 면접 같은 거라도 봐야 되는 거 아닌가요?”'다경이 애원하듯 말했다. 제발 면접에서 떨어뜨려 주었으면 하고.'“이게 면접이에요. 면접이 따로 있나요. 소장님에게 추천받았겠다, 신분 확실하고, 얼굴도 그 정도면 예쁘고. 그러니까 합격이에요.” '합격! '합격이라는 말에 다경은 눈앞이 캄캄했다. 이렇게 쉽게 합격이 될 줄이야. 어떻게든 핑계를 만들 생각에 다경이 자신의 배를 앞으로 내밀었다. 지난밤에 과음을 한 보람이랄까. 이렇게 뱃살이 많은데 설마?'“그런데 저기, 제가 뱃살이 좀 많은데 손님들이 싫어하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다이어트를 좀 하고 난 뒤에 일을 하는 게 손님에 대한 예의 같은데.”'다경의 말에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손가락으로 홀 안에 돌아다니는 한 아가씨를 가리켰다. '“괜찮아요. 저 아가씨 보세요. 저래도 손님에게 얼마나 인기 많은데요.”'그녀가 가리키는 쪽을 보자 다경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재, 뭐야? 역도 선수야?’'“난 여기 콩 다방 주인인 주은숙이에요. 그냥 마담 언니라고 부르면 돼요.”'“……네.”'대답은 했지만 집에 가고 싶은 다경이었다. 왜 이놈의 다방은 제대로 면접을 보지도 않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바리스타 자격증이라도 가지고 있냐고 물어봐야 되는 거 아냐? '''“넌 무슨 부탁인데?”'연우가 다경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여자 친구 행세 좀 해 줘.”'“여자 친구?”'무슨 꿍꿍이 속인지 여자 친구 행세를 해 달라는 연우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경의 가슴에 박혔다. '‘남연우, 속으로 날 좋아하고 있었던 거야. 내가 좀 매력이 있긴 하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남자 녀석이 대놓고 말을 못하고 그런 식으로 빙 둘러서 고백을 하다니. 그래도 머리는 좀 돌아가네. 아주 지능적인데.’'“할 거야, 말 거야?”'“그런데 왜 네 여자 친구 행세를 해야 되지? 너 외롭구나. 그렇지? 애 인대행 뭐 그런 거야?”'연우가 피식하고 웃었다. 거의 콧방귀 수준으로.'“착각하지 마. 사정이 있어서 그런 것뿐이니까.”'“혹시 나한테 관심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커피를 마시다말고 연우가 사래에 걸렸다.'“켁! 미안하지만 너한테 전혀 관심 없거든. 난 선머슴 같은 스타일이 제일 싫어.”'그녀가 싫어서 나온 말은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은 방어벽 차원에서 던진. '선머슴. 그것까지는 그렇다 치고 제일 싫다는 말까지 강조할 건 뭐야. 나도 너 같은 스타일 완전 밥맛이거든. 그렇게 대답을 하고 싶은데 눈에 보이는 연우의 모습이 좀 매력적이긴 하다. 그래도 반격은 해야겠다.'“나도 너 같은 스타일 완전 밥맛이야. 느끼하고 기름지고.”'다경의 말에 아무런 감흥도 없이 연우가 입을 열었다.'“그냥 거래일뿐이야, 싫음 말고. 여기 콩 다방 재계약 날짜랑 맞춰서 내가 계약한 거라 내일이라도 당장 인테리어 들어갈 수 있어. 어떻게 할래?”'협박인가. 그렇지만 뭐 법적으로 아무런 하자도 없으니…….'다경이 하기 싫은데 연우 얼굴을 봐서 억지로 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좋아.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연우 네가 외로워서 여자 친구가 필요하다면 내가 해 줄게. 동창 좋다는 게 뭐야. 어려울 때 서로 돕는 거지. 그건 그렇다 치고 어떻게 도와줄까. 영화 보기? 아니면 놀이 공원이라도 갈까? 드라이브도 괜찮을 것 같고, 하지만 한 가지 외박은 절대 안 돼.”'어이가 없어 연우가 물끄러미 다경의 표정만 살피는데 다경이 다시 입을 열었다.'“뭐가 필요해? 애인 대행이라면서.”'“별 것 없어.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일종의 서로간의 계약이지. 내 부탁만 들어주고 나면 끝이야.”'“그러니까 그 부탁이 뭐냐고?”'턱을 한 번 매만지고 연우가 입을 열었다. '“우리 집에 가서 부모님께 나하고 사귄다고 인증만 해주면 돼!”'헉! 생각보다 좀 강한 부탁에 다경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부모님께 인증을 하다니. 뭐 휴대전화 인증하는 것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몰아가서 얼렁뚱땅 나하고 사귈 생각인가. 생각보다는 상당히 고단수인데.'“할 거야, 말 거야? 하기 싫으면 내일이라도 당장 인테리어 들어갈 거야.”'또 협박이야. 마지못해 다경이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그것만 하면 끝이지. 나중에 같이 여행 가자거나 그러는 거 아니지?”'“전혀.”'“언제 가면 돼?”'“말 나온 김에 오늘 가자!”'''“나 그만 갈게. 잘 자!”'연우가 후다닥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그녀와의 키스, 너무나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마치 설명할 수 없는 어떠한 신비로운 힘에 의해 끌려가듯 그녀의 입술에 끌려갔다. 다가간 것이 아니라 끌려갔다. 그렇게 연우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대리운전을 부르고 자동차까지 걸어가는 동안 연우는 정신이 아득했다. 그녀와의 키스는 정말 짜릿했다. '방으로 들어간 다경은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방금 입술을 훑고 지나간 부드러운 그 감촉에 온몸에서 열이 나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마음을 정화시키기 위해 다경이 눈을 감고 머릿속에서 양을 세었다.'‘여긴 넓은 초원이고 초원 위에 양이 뛰어 다니고 있어.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다경이 양을 스무 마리 정도 세었을까. 조금만 더 세면 잠이 쏟아질 것 같은 분위기라 다경이 열심히 양을 더 세는데 갑자기 양 한 마리의 위로 다른 양이 올라가더니 교미를 하는 게 아닌가. '이것들이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거야, 뭐야? 가뜩이나 지금 심장이 두근거려 죽겠는데. 그 바람에 다경의 몸은 더욱 뜨거워져만 갔다. 게다가 아직 술이 깨지 않아 이상한 상상은 더욱 커져만 갔다.'‘아, 이럴 줄 알았으면 수놈과 암놈을 같이 세는 게 아니었는데. 아무튼 이다경, 미쳤어. 그가 키스를 하는 걸 뻔히 알면서 그냥 다 받아줬잖아. 바보 같이 왜 그랬을까.’'후회를 해도 이미 늦어 버렸다. 연우와 키스를 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키스는 정말 달콤하고 짜릿했다. 그 짜릿한 키스의 여운을 뒤로 하고 다경이 다시 잠을 청했다. '다시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을 세기 시작했지만 곧 양들이 연우의 얼굴로 바뀌더니 다경을 향해 다가오는 바람에 다경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다방에서 일을 하는데다, 키스까지 허락하고. 날 너무 쉬운 여자로 보는 건 아닐까.’ '이상야릇한 감정을 가슴에 안은 채 다경이 다시 양을 세기 시작했다. 양 오십 일곱 마리, 양 오십 여덟 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