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동적인 일탈의 끝. 돌아가야 할 곳은 단 한 군데였다. 일상. 문득 서울을 생각하는 그녀의 얼굴에 깊은 수심이 내려앉았다. '나가봐야 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무도 그녀를 기다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집, 결국 그곳밖에는 없는 것이다.'침울한 그녀의 얼굴을 보던 스님이 제안했다.'“여기는 인가가 드문 산골마을입니다. 누추하지만 원하신다면 하룻밤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도 됩니다.”'더없이 정중한 제안, 더없이 친절한 웃음. 정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래도 실례가 되지 않을까요?”'“물론입니다.”'고개를 끄덕여 보인 스님이 앞장서자, 정하도 더 이상 고민 없이 배낭을 짊어졌다. '산사는 대웅전 하나와 법당 하나, 그리고 별채 하나로 작고 아담했다. 산사를 빙 둘러싸고 사철나무가 큰 키를 자랑했다. 아늑한 분지 형태의 마당과 석탑이 무척 정겨워 보였다.'“별채 마루에 배낭을 두고 앉아 있어요. 내 수정과 한 잔 내오리다.”'“아니, 아닙니다. 불편을 끼치고 싶지 않아요.”'“불편이라니, 손님께서는 그런 말씀을 하실 필요가 없어요.”'스님은 나이가 어린 그녀에게 존대를 해 주었다. 불교에 귀의한 분이라 그런지 말투가 몹시 예스러웠다.'툇마루에 앉아 있노라니 시원한 산들바람이 이마에 맺힌 땀을 식혀주었다. 기분 좋게 바람을 맞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별채의 방이 하나뿐이라 생각했는데 섬돌이 두 개였다. 그럼 방이 두 개? 꼼꼼히 살펴보자 과연 손잡이 달린 문이 좌우로 두 개가 나 있었다. '들리는 것은 바람에 살랑거리는 풍경 소리뿐이었다.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졌다.'지난밤을 꼬박 새우고 오후가 되었으니, 더구나 마음까지 편안하다보니 스르르 눈이 감겨왔다. 잠들면 안 되는데…… 스님이 수정과를 내온다고 하셨는데……. 툇마루 기둥에 기댄 머리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부스럭 하는 소리에 설핏 들었던 잠이 깼다. 동시에 ‘쏴’하는 바람 소리까지 들리자 잠결에 눈을 뜨던 정하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사철나무 뒤로 숨기 시작하는 태양이 만들어낸 장난으로 주위가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미처 제정신이 들기도 전 마주한 곳의 낯선 정경에 정하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황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일어서는데, 갑자가 커다란 지게를 진 행자복 차림의 남자가 불쑥 모습을 나타냈다. '별채 지붕까지 닿을 듯 쌓인 나뭇가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게에 맨 남자의 모습이 놀랍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더 놀란 것은 남자의 뒤에서 뛰어나온 개 때문이었다. '그녀를 본 송아지만한 개가 입에 거품을 물고 짖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 집에서 키우던 개에게 다리를 물린 뒤, 정하는 개라면 질색을 했다. 그다지 상처가 깊지 않았음에도 이상하게 개가 싫었다. 그것은 커서도 마찬가지라 자그마한 애완용 강아지에게도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그런데 저렇게 큰 개라니!'“아악!”'깜짝 놀라 일어서다 그만 섬돌 아래를 헛딛고 말았다.'“엄마야!”'‘아차’ 할 겨를도 없이 넘어지고 말았다. 왼쪽으로 넘어지자 본능적으로 바닥을 짚기 위해 오른손이 움직였다. 그리고 충돌. '오른손에서 끔찍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대로 갈기갈기 찢겨 죽겠다는 절체절명의 위기감이 닥친 순간,'“장군, 그만해!”'단호하고 권위적인 명령이 들린 순간, 개는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앉아!”'남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앞발을 가지런히 모은 채 앉았다. 뾰족한 이를 드러내며 달려들던 개의 놀라운 변화에 신기해할 틈도 없이 정하는 신음을 내질렀다. '“아, 앗!”'넘어질 때 바닥을 짚은 손목이 끔찍한 통증을 호소했다. 일어나지 못하고 끙끙거리자 남자가 결코 가볍지 않은 그녀를 가뿐히 들어 툇마루에 앉혀주었다. 순간 상쾌한 소나무 향이 코끝으로 물씬 파고들었다. '“누구세요?”'산사에는 스님뿐이라 생각한 그녀의 질문이었다. 180센티미터는 가볍게 넘을 큰 키의 남자가 그녀의 물음에 반듯한 이마를 찌푸렸다.'“그건 내가 물을 말인 것 같습니다만.”'그의 목소리에는 희미한 불쾌감이 묻어 있었다. 저 도사견처럼 말이다. 개는 자신의 영역을 침범 당했다는 생각에 아직도 숨을 씨근덕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