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내 여자 말희

서른둘이 되던 해 초겨울,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위암수술을 받은 지 6개월이 지났을 때였다. 나는 독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중이라 아버지 수술 받으실 때만 보름정도 한국에 다녀간 후 경과가 좋다는 병원 의사의 말에 어느 정도 마음을 놓고 있던 참이었다. 논문을 제출하고, 구술면접을 한 날 동생 재성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버지가 갑자기 의식을 잃었는데, 검사를 해보니 암세포가 전신으로 퍼져 손 쓸 도리가 없다는 소식이었다. '솔직히 아버지가 그렇게 빨리 가실 줄은 몰랐다. 아버지는 독하고 뚝심 있는 검사로 유명했고, 검찰총장 인사에서 미끄러졌을 때도 훌훌 털고 모교로 돌아가 학생들을 가르칠 정도로 심지가 강한 분이었기에 위암처럼 평범하고 흔한 병에 그렇게 쉽게 허물어질 줄은 몰랐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한청운’이라는 사람은 위암을 이겨내고 철인3종 경기에 출전할 줄 알았다. 그런데 철인3종 경기는커녕 내가 탄 비행기가 한국에 도착하기도 전에 숨을 거두었다. 숨을 거두기 전 잠시 의식이 돌아와 식구들을 알아보았다며 모두들 나의 늦은 도착을 안타까워했다. '선산에 아버지를 모시고, 모두들 말이 없었다. 작은아버지와 사촌동생이 함께 사는 2층 주택은 초저녁부터 정적이 감돌았다. 작은 아들 부부내외의 사별에 이어 큰아들까지 먼저 앞세운 할아버지는 넋을 잃은 사람처럼 소파에 앉아 있다 조용히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 나를 비롯해 두 동생들도 할 말을 잃은 듯했다. 살림을 해주시는 박씨 아줌마가 바깥 추위에 언 몸을 녹이라고 꿀물을 내오자 모두들 한입 마시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나도 꿀물 몇 모금으로 입 안을 데우고, 2층에 있는 내 방으로 올라갔다. 그리곤 검은 양복을 추슬러 놓을 생각도 없이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누웠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며칠 동안 밤을 지새우다시피 했으니 곯아떨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식이 또렷했다. 눈을 감고 잠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의식은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처럼 머리를 조였다. 마치 과녁으로 날아가게 될 순간을 숨죽이며 기다리는 활처럼 내 머릿속은 하나의 질문만 가득 찼다. 내가 제시간에 도착했다면, 아니 내가 도착할 때까지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어떤 말을 하셨을까? 그리고 나는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이생에서 아버지와 아들이란 인연으로 만난 것을 감사드린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아버지를 사랑했다는 말? 글쎄, 잘 모르겠다. 장남이어서 그런지 다른 형제들은 몰라도 나에게는 속엣 말도 자주 하시고, 가끔 함께 술도 기울였으니 새삼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아버지는 알고 계셨을 거다. 그럼, 난 무슨 말을 듣고 싶고 하고 싶었던 걸까? 무슨 말을 하고 싶었기에 모두가 지쳐 나가떨어지는 그 밤, 잠도 못 자고 그랬던 걸까? '머리가 멍했다. 뿌연 물안개가 낀 듯 모든 것이 이지러진 느낌이었다. 그렇게 이지러져 있는 안개 속에 누웠는데 며칠째 떠 있었던 눈꺼풀이 쉬고 싶었는지 제 스스로 내려갔다.

미리보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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