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빙이 있는 날. 첫날과 마찬가지로 점식식사를 끝낸 은초는 시사실로 향했다. 현호의 핸드폰은 아침부터 계속 꺼져 있었지만 시사실에서 만날 거라는 생각에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그는 시사실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어제 대충 화해를 했지만 안 좋게 헤어진 후라 왠지 기분이 뒤숭숭했다.'시사가 끝나고 더빙 스튜디오로 이동하는 시간에 결국 남천에게 눈인사를 하며 다가갔다. 어제 취해서 실수했던 걸 기억하는지 은초를 본 그는 민망한 듯 낯을 구겼다. 사실 어젯밤 남천으로 인해 제일 곤경에 처했던 것은 그녀였다. 필름이 끊겨 아무것도 기억 못한다며 평소처럼 뻔뻔하게 굴었으면 아무리 나이 많은 선배라도 때려주고 싶었을지 몰랐다. 그러나 은초는 생글 웃으며 자연스레 현호에 대해 물었다.'"현호 선배님은 같이 안 오셨나 봐요."'남천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어? 어, 아까 내레이션 녹음하던데 아마 스튜디오로 바로 올걸? 걔가 원래 시사 이런 거 잘 안 참석하거든."'옆에 가던 민수가 슬쩍 끼어들었다. 은초와 했던 라디오 드라마에서 현호가 CM을 양보하고 배역을 바꾼 바로 그 선배였다.'"저번은 아마 첫 녹음이니까 왔던 걸 거야. 왜? 박은초 씨 관심 있어?"'"관심은요. 뭘……."'"하긴 관심 가져봤자 늦었지. 현호 요즘 연애하느라고 정신없다며. 생전 여자에 관심도 없는 것처럼 굴더니 그렇게 뒤로 호박씨 까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근데 도대체 누군지 모르겠단 말야."'남천도 궁금한 얼굴로 한마디 했다.'"어제 같이 술 마시면서 은근슬쩍 떠봤는데 성우인 거 같더라. 그거 말고는 통 내색을 안 하더라구."'"내 생각도 그래. 밥 먹을 시간도 없다면서 연애하는 걸 보면 분명 가까운 반경 내에 있는 사람일 텐데…… 혹시 박은초 씨 뭐 들은 거 없어? 둘이 나이도 비슷하고…… 그러고 보니 같은 라디오 드라마에 이번엔 더빙까지 같이 하네. 근데 원래는 둘 다 현호가 할 게 아니었다지 아마?"'민수는 은근슬쩍 은초를 의심하는 눈치였다. 현호가 CM 같은 굵직한 일을 마다하고 갑자기 안 하던 라디오 드라마를 하겠다고 할 때부터 미심쩍어했었던 것이다.'정곡을 찔린 은초가 뭐라 말을 돌릴까 당황해하는데 남천이 손사래를 치며 만류했다.'"에이, 은초 후배는 아냐. 어제 보니까 근사한 애인이 딱 버티고 있던데 뭘."'은초는 그런 남천을 보며 고마워해야 할지 원망해야 할지 난처했다. 분명한 건 그가 나설 때마다 은초의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는 것이다. 해서 그녀도 짓궂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애인 아니라 학교 선배라니까요. 근데 전 남천 선배님 애인이 더 궁금한데요?"'민수가 놀란 표정으로 남천을 보았다.'"형 연애해?"'"아이구, 다 늙어서 연애는 무슨! 그냥 서로 만나서 몇 마디 하고 그러는 거지. 근데 시작부터 이것저것 삐걱거려서 힘들다, 힘들어."'땀을 뻘뻘 흘리며 변명하는 남천과 달리 민수는 금방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누군지 몰라도 심봤다 생각하고 꼭 잡으슈. 남자로 태어났으면 동정은 떼고 죽어야 할 거 아냐."'"저 자식이!"'역시 나이 든 사람의 연애란 그다지 사람들의 호기심과 궁금증을 유발하지 않는 모양이다. 나이 먹는 게 서러운 이유 중 하나인 것 같았다.'"그럼 역시 현호하고 혜림인가?"'"민혜림이?"'"둘이 환상의 복식조잖우. 더빙하다 눈 맞은 커플이 어디 한둘인가?"'때마침 곁을 지나가던 혜림이 호호 웃으며 다가왔다.'"선배님들, 사람 없는 데서 무슨 뒷담화를 그리들 하세요?"'남천이 있지도 않은 추리력을 발휘하며 게슴츠레 혜림을 요모조모 살펴보았다.'"그러고 보니 요즘 더 예뻐진 것도 같고…… 바른대로 말해봐. 현호랑 연애하지?"'혜림은 은초를 한 번 쳐다보고는 교태스런 웃음을 흘렸다.'"호호, 현호랑 저랑 연애한 게 뭐 어제오늘 일인가요? 이제는 걔 신음 소리만 들어도 몇 분 만에 끝날지 아는데."'"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