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인용 식탁은 오랜만에 자리가 꽉 찼다.'"할아버지, 촛불 빨리요!"'어린 손자의 재촉에 박 사장은 케이크의 촛불을 힘껏 불었다. 올해로 예순여덟. 그는 식탁 주위를 둘러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돌아보니 이만큼 만족스럽고 평탄한 인생도 드물었다. 함께 늙어가는 고운 아내와, 유능한 의사와 변호사인 아들과 딸. 게다가 며느리는 참하고 심성이 고왔으며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예쁜 손자 손녀까지 있었다.'현재 그의 걱정이라면 서른을 넘긴 딸이 아직 짝을 못 만났다는 정도. 그러나 예쁘고 똑똑한 딸을 이집 저집에서 탐내고 있으니 그것도 별 걱정거리는 아니다 싶었다.'"은초야, 아버지 친구 중에 버스회사 운영하는 김 아저씨 알지?"'식사 후 과일을 먹으며 그는 넌지시 운을 띄웠다.'"알죠. 작년에 아주머니가 위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했잖아요."'"그래, 그 김 아저씨 아들이 이번에 새로운 회사를 인수했다더라. 법률적인 문제로 고민하는 것 같기에 내가 널 추천했다. 유능한 변호사를 곁에 두고 웬 걱정이냐고 큰소리쳤지."'사과를 베어 먹던 은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아버지, 그, 그건……."'"당신도 참. 은초는 가사사건 담당이잖아요. 분야가 다른걸요."'"아, 똑같은 육법전서 가지고 공부했는데 다를 게 뭐 있어! 김 아저씨 아들 말이다, 걔가 참 괜찮은 녀석이지. 너도 만나보면 알겠지만 예의 바르지 똑똑하지……."'박 사장의 일장 연설을 들으며 은초는 억지로 웃었다. 보다 못한 오빠 내외가 나섰다.'"아버지도 참, 모처럼 집에 온 애 쉬게 좀 놔두시지 않고. 그런 얘긴 천천히 하세요. 그렇지 않아도 회사 일만으로도 정신없을 텐데."'"그래요, 아버님. 아가씨가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오빠와 새언니의 말을 들으며 은초는 무지하게 찔렸다. 오늘 새벽까지 술을 마셨더니 아직까지 그 여파가 얼굴에 남아 있는 모양이다. 이십대 때까지는 한숨 자고 일어나면 말짱하게 뽀샤시해지더니 역시 삼십 줄에 들어서니 피부부터 표가 났다.'"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다. 긴말 필요 없고, 내일 같이 사무실로 찾아가마."'오 마이 갓! 은초는 급기야 사레에 걸려 콜록대고 말았다. 결국 자백하지 않고는 안 되는 상황이 온 것일까? 언젠가는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역시 진실을 알리기엔 두려웠다. 그녀는 오빠 뒤로 살며시 몸을 숨기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저…… 로펌 그만뒀어요."'아버지는 무언가로 얻어맞은 듯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지금껏 실망 한 번, 말썽 한 번 없이 커온 딸이었다. 게다가 단숨에 사법고시에 합격한 로펌의 젊고 유능한 변호사인 딸은 그의 자랑이자 자존심이었다. 그런데 언질 한마디 없이 백수가 되다니. 성미 급한 박 사장은 간신히 화를 누르며 물었다.'"언제?"'은초는 아랫배에 힘을 주고 당당히 대답했다.'"육 개월 됐어요."'"……!"'그러나 곧 일그러지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는 그 길로 부리나케 줄행랑을 쳤다.''"뭐야, 자다가 내쫓긴 듯한 이 초라한 행색은?"'문을 열어준 재진은 은초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훑어보다가 황당한 듯 중얼댔다. 한밤중에 재진을 찾아온 은초는 트레이닝복 차림에 부스스한 머리 꼴로 손에 커다란 트렁크 하나를 질질 끌고 현관으로 들어선 것이다.'"쫓겨난 듯이 아니고 쫓겨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