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 이인석은 넓은 책상 앞에서 아침부터 회의와 공장 방문으로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낸 후 조금은 한가한 마음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이만 때 즈음이었다.'군 복무를 끝내고 복학해서 아직 고등학생 티를 벗지 않은 작고 귀여운 신입생을 만났던 그 캠퍼스.'그 아이의 밝은 미소에 답답한 마음이 풀렸고, 차분한 목소리에 위안을 얻었다.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적으로 힘이 들었던 시기를 이겨낼 용기가 생겼다. 사랑했지만 좋아한다는 고백은 고사하고 말 한마디 못하고 지나갔던 1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무작정 도망쳤던 그해 겨울.'그때 조금만 더 힘이 있었더라면 지금 이렇게 가면을 쓰고 공허한 마음으로 살아가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안석의 상념을 깨우는 노크 소리가 들리고 비서가 들어왔다.'인석은 재빨리 현실로 들어왔다.'“무슨 일이지?”'“강신혜 씨가 오셨습니다.”'“들어오라고 해.”'“예. 사장님.”'비서가 나간 후 신혜가 잔뜩 꼬인 얼굴로 들어왔다.'“내가 이 사무실을 들락거린 지가 몇 년인데 아직까지 비서를 거쳐야 하니 참 한심하다. 개나 소나 돈만 있으면 아무나 하는 게 사장인데, 사장이라고 그렇게 유세 떨고 싶니?”'“어서 와.”'“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 사무실은 너와는 참 안 어울린다. 너도 너무 큰 옷 입은 느낌 들지 않니?”'단 한번이라도 꽈배기처럼 말을 안 하면 강신혜가 아니지.'잘 돌봐 주어야 할 동생이라고 생각했던 성하와 약혼하기로 결심한 그날부터 신혜의 비꼬는 말은 자신의 마음을 속인 벌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앉아라. 무슨 일로 왔니?”'“나 지금 공항 간다.”'“왜?”'“이탈리아에 놀러 가려고.”'“정말 떠나기로 결심한 거야? 가게는 어떻게 하고?”'“너희 집 노인네가 나만 보면 항상 하는 말이 있었지? 손바닥만 한 가게 집어치우고 시집이나 가라고. 내가 얼마나 공을 들여 키운 가게인데 노인네가 함부로 말하는 것이 속이 상해서 성질 피우기도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말도 정답인 것 같아서 노인네 표현대로 손바닥만 한 파스타 가게 따위는 누가 집어가던 말던 버려두고 난 시집보다 훨씬 먼 이탈리아에 가기로 결심했어.”'“아줌마는 반대하지 않으셨어?”'“가게 접는다니까 시집가는 줄 알고 좋아하다가 이탈리아 간다고 하니까 충격을 먹었는지 머리 싸매고 누워서 어울리지 않게 네 마누라 흉내 내는 모습 보고 한번 웃어주고 집 나왔어. 생각 있으면 위로 전화라도 한번 해 보던지. 물론 너희 집 노인네나 네 장모가 어련히 알아서 위로 잘해 주겠지만.”'“도착하면 전화해라. 힘든 일 있으면 도움 요청하고.”'“기대하지 마. 집 떠나면 연락 끊어 버리는 못된 성격 너도 알지? 아마 몇 년에 한번 전화 한통 하겠지.”'“하하.”'“나 떠나는 것이 아쉽니?”'“당연하지.”'“네 마누라와 이혼하고 나와 결혼해 준다면 지금이라도 마음 바꿔서 이탈리아에는 안 갈 수조 있어. 한번 생각해 봐.”'“마지막까지 까분다.”'“그럼 너희 집 노인네, 네 장모, 우리 엄마, 네 마누라 한꺼번에 병풍 뒤에서 향냄새 맡는 사태가 생기겠지? 난 매년 제사상 차리느라 등골 빠질 것이고, 넌 쌍둥이 껴안고 괴로움에 몸부림 칠 거고. 너무 환하게 보이는 풍경이 재미없어서 그냥 떠난다. 안 그래도 너희 집 노인네가 내가 너 잡아먹을까 봐 노심초사했는데 이제 안심하라고 전해 드려라. 이제 간다.”'“공항까지 배웅 안 해도 되겠니?”'“우리 집 식구들도 안 하는 배웅 네가 왜 해? 넌 그냥 네 자유와 맞바꾼 이 사무실에 앉아 있어라.”'“몸조심해.”'“응. 고마워.”'신혜가 출입구로 가서 문을 열려다 뭔가 생각이 난 듯 몸을 돌려 인석을 바라보았다.'“아! 잊을 뻔했다.”'“뭐?”'“내가 너에게 줄 마지만 건물을 준비해 놨거든?”'“갑자기 무슨 선물?”'“숨겨 놨으니까 천천히 찾아봐. 그럼 난 진짜 간다. 잘 있어라.”'신혜는 묘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문을 열고 나갔다.'문이 닫히자 인석은 쓸쓸함을 느꼈다. 유일하게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고 위로해 주던 친구였다. 그녀가 떠난 후 더 외로워질 것을 생각하니 넥타이를 맨 목이 더 조여드는 기분이 들었다.'우신식품 빌딩을 나온 신혜는 인석의 사무실을 잠간 바라본 후 택시를 탔다.'“공항에 가 주세요.”'“예.”'택시가 공항을 향해 달려가는 동안 신혜는 새 잎이 돋아날 준비를 하고 있는 가로수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인석아. 언제까지 그렇게 참고만 살지 마라. 외로워도 외롭다는 말 한마디 못 하고 효자 아들, 자상한 남편, 든든한 사위, 능력 잇는 사장 연기 언제까지 할 거니? 시한폭탄 같은 네 모습이 항상 불안했어. 하지만 네 외로움이 너무 안타깝지만 난 네 외로움을 풀어줄 능력이 없어서 그냥 떠난다. 대신 내가 마련해 준 선물 소중하게 간직하렴. 친구가 주는 마지막 배려라고 생각해.’'택시는 거침없이 공항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