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즈와의 만남''' 답답한 하루하루였다. 고시생이라는 이름 하에서 허락되지 않는 것이 너무도 많았고, 거기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엄청났다. 그건 사실 공부 자체에서 오는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놀면서 받는 압박감이 훨씬 심했다. 견디기 힘든 날이면 신림동 거리를 배회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평균연령이 낮은 인구가 밀집되어 있는 이상한 동네. 그 거리로 마음의 답답함이 풀리지 않을 때면 동네를 벗어날 때까지 계속 걸어 나갔다. 이어폰으로 듣고 있던 판례 녹음도 꺼 버리고 그렇게 그냥 수험생이라는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어 던졌다. ''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서술형 시험인 2차 시험을 대비해 치르는 모의고사의 첨삭이 짜증나서였는지 독서실 옆 자리 사람이 책에 줄 칠 때 좀 조용히 해 달라고 내 자리에 붙였던 포스트잇이 짜증났던 것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고시촌을 벗어나고 싶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나는 큰 길을 건너 계속 걸어 나갔다. 작은 개천 위의 짧은 다리를 건너자 산책로가 나타났다. 농구장에는 서너 명이 농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시계를 힐끔 쳐다봤다. 밤 11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늦었다. 얼른 돌아가야지. 후우……. 낼 시험도 봐야 하는데, 보기 싫다. 공부도 안 되어 있고.’' 생각과는 정반대로 난 한쪽에 있는 빈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을바람이 조금 쌀쌀했다. 재시 2순환. 사법시험 1차를 합격하면 두 번의 2차 기회가 주어진다. 보통 초시라 부르는 첫 시험은 크게 기대하지 않고 본다. 그 전의 기간을 예비순환이라 부른다. 그리고 두 번째 시험은 재시라 부르고, 7과목을 1순환, 2순환, 3순환 기간에 맞춰 공부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 기간 동안 학원에서는 진도에 맞춰 모의고사가 제공됐다. 11월부터 3월까지는 2순환 기간이었다. 난 그 기간에 있었다.' “혹시 앉아도 될까요?”' 누군가 다가오는 것도 모른 채 생각 없이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난 살짝 움찔하며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공을 올려다봤다. 가로등 불빛이 그의 뒤에서 비추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남자치고는 매우 야윈 느낌의 그는 깔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그는 내 대답을 딱히 기다리며 물은 것은 아니었는지 내가 대답하기 전에 벤치 한쪽에 나로부터 멀찌감치 털썩 주저앉았다. ' “…….”' 평소의 나였다면 벌떡 일어서서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것이 맞을 것이었다. 난 내 영역에 누군가가 들어오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신경 쓰이지 않는 척 정면을 주시하고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사실은 옆에 앉은 그가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조금 무섭기도 했지만, 아직 농구하는 청년들도 있어 무슨 일이 있으랴 싶었다. 난 옆에 앉은 그에게 신경 쓰지 않으려 엠피쓰리를 켰다. 형법 판례가 흘러나왔다. ' [형법 제12조의 저항할 수 없는 폭력은 심리적인 의미에 있어서 육체적으로 어떤 행위를 절대적으로 하지 아니할 수 없게 하는 경우와 윤리적 의미에 있어서 강압된 경우를 말할 수 있다고 하겠으며, 일정한 협박이란 자기 또는 친족의 생명․신체에 대한 위해를 달리 막을 방법이 없는 협박을 말하고, 강요라 함은 피강요자의 자유스런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게 하면서 특정한 행위를 하게 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렇게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그와 나는 말없이 그렇게 앉아 있기만 했다. 그가 넥타이를 살짝 느슨하게 하는 움직임에 나는 살짝 움찔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그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처럼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내일도 나올 거예요?”' “네?”' 난 황당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이번에는 좀 더 자세히 그의 얼굴을 살폈다. 혹시라도 아는 사람인데 알아보지 못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는 정신은 멀쩡해 보였지만 내가 아는 사람 같지는 않았다. 사실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잘 알았기에 확신이 서진 않았다. 나를 아냐고 물으려는데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거기 원래 제 자리거든요. 원랜 이 시간에 오는 사람이 없는데, 앉아 계셔서 깜짝 놀랐네요.”' “아…… 안 올 거예요. 자리 뺏어서 죄송해요.”' “근데 누군가 먼저 앉아 있는 게 기분 나쁘지 않던데요.”' “…….”' 아마 정신이 살짝 이상한 사람이겠거니 생각했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자취방까지 돌아갈 길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가 따라올까 봐 걱정됐지만 다행히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두 발자국 정도 움직였을 때, 그가 뒤에서 외쳤다.' “난 홈즈예요!”' 그의 말에 난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오려 했다. 난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뒤돌아봤다. 그가 일어서 다가오기 시작했다. 난 갑자기 두려워졌다. 머릿속으로는 재빨리 뛰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 “11시부터는 항상 이곳에 있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미칠 것 같이 답답한 날엔 여기로 와요. 말 들어주는 데는 나 같은 사람이 없으니까요.”' “…….”' 난 그에게 독심술이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내 얼굴에 짜증이 잔뜩 묻어나 있어 그가 추측한 것이리라 생각하는 것이 좀 더 논리적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난 그가 내 머릿속에 들어갔다가 나왔다고 생각했다. ' “그쪽은 이름이 뭐예요?”' “이름이 정말…… 홈즈예요?”' “흠……. 적어도 우리 사이에서는.”' “그럼, 음…… 난 새봄이에요.”' 다시 볼 일 없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이름을 알려줬다. 물론 본명은 아니었다. 내 이름은 신춘. 친구들은 봄이라고도 많이 불렀다. 그는 내가 이름을 알려준 것이 감동이라는 듯이 활짝 웃었다. 그 웃음이 그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난 여전히 의심 가득한 눈으로 그를 마주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새봄. 정말 예쁜 이름이네요. 내일도 나오시면 제가 재밌는 이야기해 드릴게요. 11시에요. 난 여기 11시부터 한 시간 정도 늘 있어요.”' “홈즈 씨, 전 안 올 거예요. 편하게 자리 차지하세요.”' 난 빠른 걸음으로 자취방으로 향했다. 심장이 콩닥거렸다. 기분이 정말 이상했다. 무엇보다도 남자 친구인 동찬에게 미안한 마음이 한가득 들었다. 난 호주머니 한쪽에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