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에 오를 때까지 시선을 뗄 것 같지 않은 영후의 집요한 눈길에 아린은 아랫입술을 바짝 깨물었다. 그러자 치아에 깨물린 그녀의 입술은 본래의 붉은색을 잃고 금세 핏기가 가셔 새하얗게 되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그를 만만한 남자라고 여겨본 적은 없었지만, 완고하다 못해 꽉 막히게 느껴지는 그의 성격에 아린은 답답함을 넘어서 짜증이 확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더욱 못마땅하고 심사가 꼬이는 것은 그런 그에게 큰소리를 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였다. 원치 않는 일을 강요당하는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그에게 애처로운 모습으로 애원을 하는 것뿐이란 말인가! 억울하고 기가 막혀 죽을 일이었다. '“제발 부탁해요. 부탁한다고요.”'아린은 모든 자존심을 접고 그에게 다시 한 번 애원했다.'“제발요, 제발!”'연이어 터지는 그녀의 ‘제발’ 소리에 영후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쓴 웃음을 지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어지럽게 흔들리는 것이, 할 말을 잔뜩 입 안에 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린은 그의 그런 표정을 마음이 약해진 것으로 해석했다. 일찍이 그의 동정을 사서 원하던 바를 이루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어쩌면 오늘 처음으로, 그를 설득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겨났다. 좀 더 졸라보면 그가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어떻게 해야 하지? 더 불쌍한 표정을 지어야 하나?’'그 외에 별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아린은 곧장 버려진 강아지처럼 불쌍해 보이도록 눈 꼬리를 끌어내리고 턱을 살짝 비틀었다. '“제발요. 난 그곳으로 가는 게 정말 싫어요.”'하지만 그녀의 잔꾀는 역효과를 내는 데 그칠 뿐이었다. 잠시나마 갈등하듯 흔들리던 영후의 눈빛은 그만 짜증으로 가득 차올랐고 입매는 더욱 차갑게 다물려버렸다. '“그러니까 왜 싫은지 분명한 이유를 대라잖아. 당신은 벌써 10분 째 똑같은 말만 되풀이 하고 있어. 마치 일곱 살 먹은 아이가 떼를 쓰는 것처럼 말이야! 이제 나도 슬슬 짜증이 나려고 해. 대체 이유가 뭐야?”'“이유요? 그러니까 이유는…….”'아린은 그럴싸한 변명을 어서 찾아야 했다. 하지만 급할 때는 더욱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멍한 머릿속에는 그야말로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강한 바람 밖에는. 왜 그에게는 그저 가기 싫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없는 것일까? 아린은 오히려 그 점이 무척 답답했다. '“타당한 이유도 없으면서 당신이 괜히 그런다는 것을 난 알아. 그러니까 힘만 빠지는 이런 실랑이는 이제 그만 두자고.”'그의 얼굴은 더욱 차갑게 굳어졌다. '“그, 그런 거 아니에요!”'그가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눈앞에서 단호하게 좌우로 흔들었다. 언제나 그렇듯 영후는 칼로 무 자르듯 너무나도 단호한 사람이었다. 아린은 그의 마음을 흐트러지게도, 약해지게도 하지 못하는 자신의 빈약한 영향력에 자괴감이 일었다. '“나는 당신의 그 끝도 없는 어리광을 받아줄 마음이 전혀 없으니까 이제 그만 단념하는 게 좋을 거야. 당신은 내 말대로 무조건 그곳에 가 있어야 해. 반드시 그래야 해. 절대적으로! 알아듣겠어?”'영후는 더 이상 차가울 수 없을 만큼 차갑게 내뱉었다. '잠시나마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순전히 그녀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그가 어디 단 한 번이라도 약해지는 모습을 보인 적이 있기나 했던 사람이던가. '그와는 부모님들끼리 친구라서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온 사이지만 그는 아린에게 늘 차갑고 단호하고 몰인정한 태도를 고수했다. 뜻하지 않은 약혼을 한 이후로 그냥 ‘아는 오빠’였던 그가 ‘약혼자’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아린에 대한 그의 태도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싸늘하고 엄격해졌다면 모를까.'“왜죠? 왜 내가 그곳에 가야만 하죠?”'“…….”'가고 싶지 않은 마땅한 대꾸를 찾지 못한 아린은 영후에게 왜 자신이 꼭 그 시골마을로 가야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물었다. 그의 입에서도 역시 타당한 대답이 떨어지지 않으면 그와 똑같은 논리로 저항을 해 보고자 하는 뜻에서였다. 순간 아린은 제법 논리적인 생각을 한 스스로가 대견스러웠다.'“말을 해 봐요. 당신은 내가 왜 반드시 그곳에 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 건데요?”'아린은 그의 입에서 ‘넌 내가 산거나 마찬가지인 여자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만 해.’ 따위의 말이 나오길 기다렸다. 그보다 더 심한 말이라면 더욱 환영이다. 그가 차가울수록 정신을 더 바짝 차릴 수 있을 테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 무슨 변명거리라도 떠오를 것이고, 그래야 시골로 내려가지 않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웬일인지 그의 입에서는 뜻하지 않은 우려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미간까지 잔뜩 찌푸린 것이 정말 그녀를 위해 근심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야말로 일순 그의 표정에 깜박 속을 뻔 했다. '“이곳의 공기는 당신에게 좋지 않아.”'“서울 공기는 벌써 몇 년 째 마시면서도 잘 살고 있다고요. 그런데 왜 이제와 새삼 유난스럽게 구는 건데요? 언제부터 날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기 시작했어요?”'“당신은 환자야.”'“뭐? 화, 화, 환자요?”'‘환자’라는 단어가 가져다주는 유쾌하지 않은 뉘앙스에 아린이 이마를 잔뜩 찡그렸다. '“그럼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