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저에게 연락을 하시다니, 대단히 기쁩니다.”'이 남자의 말투는 뭔가 대단히 기분이 나쁘다고 생각하며 하연은 쇼우의 맞은편에 앉았다. 커다란 창문으로 11월의 새파란 하늘이 고스란히 들어온다. '“당신이야말로 연락한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정보가 어쩌니 하더니…….”'“바빴습니다.”'그는 조금도 미안한 기색이 없이 웃는다. 하연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고 그를 보았다.'“좋아요. 날 알고 싶다고 했죠? 한 번에 하나씩 하자구요. 내가 당신 질문에 하나씩 답할 테니까, 그때마다 당신은 내 질문에 답해요. 어때요?”'쇼우는 잠시 그녀의 말을 가늠하는 듯하더니 피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싫습니다.”'하연은 팔짱을 끼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창 밖의 경치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특별히 잘생긴 남자는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무런 이미지도 없는 남자였다. 뭐랄까, 길거리에서 스치면 3초 내로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잊어버릴 듯한 외모였다. 평범하다, 그 말이 그의 외모에 대한 가장 정확한 묘사인 것 같았다. 마르지도 않고 뚱뚱하지도 않은 몸매에 회색 양복과 갈색 트렌치 코트 역시 그저 평범한 회사원같이 보이게 하는 데 일조하고 있었다.'“그럼 뭘 하고 싶은 거예요? 말을 해야 협상의 여지가 있지 않겠어요?”'“제가 협상의 여지없이 그냥 저랑 한 번 같이 자면 알고 싶은 모든 걸 다 알려드리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그의 얼굴은 여전히 반쯤 웃는 듯한 모습이다. 하지만 그의 눈은 묘하게 뭔가를 계산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하연은 얼굴에 짜증 외의 다른 감정이 나타나지 않게 하기 위해 입술 끄트머리를 비틀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고 싶어요, 정말?”'“그럴지도 모르죠. 지금 당장 궁금한 건 당신 대답입니다.”'“정확하게 말해요. 정말로 그러고 싶어요?”'하연은 그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러고 싶습니다.”'“그럼 그러죠. 근처에 호텔 많으니까 가자구요. 나 오늘 저녁엔 약속이 있으니까 시간 여유가 좀 없다는 점은 이해해줘요.”'그녀는 손목에 찬 날씬한 시계를 쳐다본 다음 핸드백을 어깨에 걸쳤다. 그의 눈이 가늘어지면서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미안합니다. 그러고 싶은 것도 사실이고, 정말로 그냥 따라가고 싶지만,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으니까요. 우선 주문부터 하시죠.”'그가 웨이터 쪽으로 고개를 까딱여 보이며 말했다. 테이블 분위기 때문인지 연신 쳐다보며 우물거리고만 있던 웨이터가 쇼우의 고갯짓에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쇼우의 눈에 조금 전과는 달리 다시 재미있어하는 듯한 기색이 떠올랐다. 하연은 짜증스러운 표정을 유지한 채 메뉴판도 펴지 않고 웨이터를 쳐다보았다.'“오렌지 주스 줘요.”'“저는 잉글리시 블랙퍼스트로 하겠습니다.”'웨이터가 허리를 굽힌 다음 사라지자 하연은 다시 팔짱을 끼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미소 띤 얼굴로 카페 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연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관찰했다.'웬만한 사람의 경우, 그녀의 판단은 거의 틀린 적이 없었다. 그녀는 상대가 뭘 원하는지 알았고, 그걸 줄지 말지는 자신의 이익에 따라서 결정했다. 하지만 도대체 이 남자가 뭘 원하는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사이토 아게하의 한국 이름이 장준영이라는 것에 대해 그는 부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상의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준영의 비서라면 왜 그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겠다는 것일까? 악의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데. 아니면 너무 오래 안전한 곳에서 생활해 오다 보니 그녀의 감각이 무디어진 것일까?'웨이터가 그녀의 앞에 오렌지 주스를, 그의 앞에는 찻주전자와 하얀 잔을 내려놓고 사라졌다. 그녀는 빨대로 주스를 휘저은 다음 천천히 빨아 마시다가 문득 시선을 들었다. 그가 그녀를 쳐다보고 있다가 재빠르게 시선을 내리고는 찻주전자를 들어 잔에 조심스레 따르며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원래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 사람인데, 일이 일이다 보니 가끔 술을 마시곤 합니다. 아무래도 기분 나쁜 일도 있고, 아직 젊다 보니 뒤에서 허튼 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그래도 혼자 있을 때는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인데, 한 번은 저한테 오렌지 주스를 달라는 겁니다.”'잔으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조르륵 소리를 낸다. 하연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