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회장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였다. 화려한 옷차림의 여자들이 술잔을 든 채 미소를 짓고, 양복을 빼입은 남자들은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를 나눈다. 한쪽 옆에서 우아한 클래식을 연주하고 있는 연주자들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양 악기에만 정열을 쏟는다. 바이올린 활이 앞뒤로 움직이고,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여자의 손에서 반지가 반짝였다.'“뭘 그렇게 보고 있어?”'나림은 뒤를 돌아보았다. 하연이 새빨간 입술을 반쯤 오므리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옷차림은 늘 그렇듯이 허벅지까지 드러난 원색의 화려한 이브닝 드레스였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수많은 여자들 가운데서도 그녀는 확연히 눈에 띄었다. 아마도 그녀를 둘러싼 역동적인 분위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림은 하연을 볼 때마다 TV 카메라들도 그녀의 매력을 다 잡아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곤 했다.'대답을 기다리듯 하연이 완벽한 활 모양의 눈썹을 치켜올렸다. 나림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턱짓으로 연주자들을 가리켰다.'“꽤나 열심히 연주를 하는구나 싶어서. 아무도 듣지 않는데 말이지.”'“돈 받고 하는 거니까 당연하잖아. 누가 듣든 말든, 그건 그 다음 문제라고.”'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고서 들고 있던 돔 페리뇽 샴페인을 한 모금 홀짝였다. 나림은 30분 전부터 들고 있었지만 한 입도 마시지 않은 술잔을 잠깐 쳐다보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 한쪽 귀퉁이에 내려놓았다. 하연이 슬쩍 그녀를 보았다.'“왜 안 마셔? 최고급이야. 끝내준다구.”'“회식 한 번 하면 질리게 마시는 게 술이야. 여기서까지 마시고 싶지는 않아.”'“흠, 그럼 나 줘. 난 여기 아니면 다시는 못 마실 것 같아서라도 열심히 마셔야겠다.”'양손에 술잔을 들고서 하연은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탐욕스러워 보여야 마땅한데도 그녀가 하면 왠지 모르게 소녀처럼 순진해 보였다. 바로 그 모습이 그녀를 최고의 여배우로 만든 것이리라. 나림은 연회장을 메운 사람들을 쳐다보았다.'“대한민국에서 한 가닥 한다는 기업가들은 전부 다 모인 것 같아.”'“응. 아마 빠진 사람 하나도 없을걸? 해외 나가 있던 사람들까지 날짜 맞춰 들어왔다고 들었는데.”'“왠지 우습네. 겨우 남의 생일 하나에…….”'“그냥 남이니? 대한민국 재계에서 요즘 제일 잘나간다는 SE 그룹 회장 생일이야. 네가 사업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기회를 놓치겠어?”'“그래서 내가 사업가가 되지 않은 거지.”'나림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빨간 입술을 오므리고 나림을 쳐다보았다.'올해 서른네 살, 서울 지방 검찰청 소속의 검사라는 지위와 나림은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연은 생각했다. 한결같은 검은 정장에 표정 없는 인형 같은 얼굴 때문인지, 매스컴에서는 그녀를 ‘마녀’라고 불렀다. 사법 연수원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검사가 되자마자 서울 지역 최대의 대형 폭력 조직 보스를 감옥에 집어넣었고, 거기다 우리나라 최대의 기업 중 하나인 SE의 회장 이세현의 사생아 딸이라는 사실은 매스컴의 끊임없는 관심을 받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저 애가 옛날부터 저런 ‘마녀’의 얼굴이었던 건 아니지. 하연은 나림의 무표정한 얼굴을 쳐다보다가 빈 샴페인 잔을 지나가는 웨이터의 쟁반 위에 올려놓고 다른 하나에 입술을 갖다댔다. 그때 검은 양복으로 둘러싸인 긴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다.'“어이, 과음하는 거 아니야?”'하연은 수많은 연예 잡지에서 칭송받는 예술적인 눈을 치켜올리며 상훈을 돌아보았다.'“내가 과음하는 거 봤어? 나림이가 마셔달라고 했단 말이야.”'나림은 양손을 들어올렸다.'“하늘에 맹세하건대, 난 절대로 그런 적 없어. 내가 안 마시겠다고 했더니 언니가 가져갔다구.”'상훈은 킬킬거리며 하연의 빈 손에 자신의 잔을 들려주었다.'“누굴 속이려는 거야, 정하연? 그 두 잔만 마시고 그만 마셔. 있다가 내가 한 병 챙겨줄 테니까.”'“이래서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니까.”'하연은 화사하게 웃으며 샴페인을 마셨다. 하이힐을 신으면 175센티미터가 넘는 그녀임에도 불구하고 상훈의 옆에 서면 알맞게 보였다. 사실 키 190센티미터의 상훈 옆에 있으면 대부분의 여자들이 다 아담해 보이긴 했다.'그렇다고 해서 상훈이 우악스럽다거나 험상궂어 보이는 타입은 아니었다. 오히려 호남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짧게 올려 깎은 머리에 짙은 눈썹, 죽 뻗은 긴 콧날은 꼭 스포츠맨 같아 보였으나 의외로 갸름한 턱선이나 긴 속눈썹 등은 묘한 매력을 더해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를 보는 사람들이 가장 강한 인상을 받는 것은 눈이었다. 소년처럼 장난기가 가득한 새까만 눈은 쉴새없이 반짝이며 사람들을 매료시키곤 했다.'하지만 단순히 외모 때문에 그가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건 아니었다. SE 그룹 이세현 회장의 둘째 아들, 나이 스물셋에 결혼했다가 아이를 낳은 후 이혼하고, 바로 그 전처와 함께 연예 프로덕션인 SE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해서 그녀를 한국 최고의 여배우로 부상시켰으며, 이세현 회장의 도움 하나 없이 회사를 업계 최고로 끌어올린 점 등도 그가 각종 매스컴의 표적이 되는 이유였다.'“넌 왜 그렇게 혼자 구석에 있어? 사람들하고 좀 어울리고 그래봐. 저쪽에 너희 부장 검사 양반 와 있던데.”'상훈의 틱틱거리는 말투에 하연이 인상을 찡그리고 팔꿈치로 그를 쳤다.'“동생한테 좀 친절하게 말해봐, 상훈 씨.”'“이 이상 어떻게 더 친절하게 말해, 저 대인 기피증 환자한테?”'하연이 다시 그를 팔꿈치로 쳤다. 이번에는 꽤나 아팠던 듯 상훈이 인상을 찡그리고 캑캑거렸다. 나림이 싱긋 웃었다.'“그래, 하연이 언니 말처럼 동생한테 좀 친절하게 말해봐.”'“동생은 무슨 개뿔……. 아, 알았어,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