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가 왕위에 오른 지 10년. 세상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난 사람은 하나 있는 법이니. 신하들 중에 임금님이 가장 신임하는 좌의정, 김재찬 대감이라. 그분의 소문 하면 털어도 먼지 하나 안 나오는 청렴결백이오, 백성에게 베풀 줄 아는 그 자비로움이니. 아이고, 조선의 한양에 참으로 존경할 만한 인물이라. 허나 하늘이 어찌 사람에게 좋은 것만 줄꼬. 김재찬 대감에게도 말 못 할 복병이 있었으니 서른넷, 늦깎이에 본 장남, 개망나니 김륜이 아니더냐. 귀하디귀하게 본 아들이라 오냐오냐 어르고 달래기만 했더니 그 오만방자함이 하늘을 찌르고, 어미나 누이나 저 앞에선 설설 기니 여인 알기를 지나가는 똥개와 다를 것 없이 하니. 거 참 사람 됨됨이가 그토록 모지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 벼슬 하나 건지면 뭐하누. 이미 한양 안에 계집질로 소문나 있는 것을. '그러나 암만해도 어디 이 여인네보다 더 힘겨울까. 열다섯이란 나이에 시집 와 빡빡한 살림살이를 야무지게 꾸며나가며 시부모 공손히 받들었으나 첫날밤 서방에게 소박맞은 건 기본이요, 이미 정분나 있는 계집들을 집으로 끌어들여 조강지처로써 위엄이 바닥에 떨어진 지 오래. 혼인한 지 십년이 지나도록 아이도 낳지 못해 집안어른들 앞에 얼굴조차 들지 못한 이가 바로 윤예영, 죽어도 김 씨 집안의 귀신이 될 김륜의 부인이 아닌가.'“침수 편안히 드셨사옵니까.”'예영이 단정한 옷차림으로 아침문안을 들이며 시부모에게 살포시 미소를 지으니 참말로 곱긴 하구나. 그러나 어디 그 미소가 밝으리. 나 홀로 문안인사를 들이는 것이 일상이라 하지만 늘 이리 혼자, 정확히 말하면 따로 인사를 하는 것이 민망하여 괜한 웃음으로 둘러대는 것이지.'“흐음, 그래. 며늘아가도 잘 잤느냐?”'“예, 아버님.”'“그나저나 륜은 여태 기침하지 않은 것이냐?”'“예에…….”'“어찌 나이도 먹은 놈이 아직도 그리 철이 없을꼬. 당장 가서 깨우거라! 이미 해가 저리도 밝거늘 아직도 자리보전하고 있다니. 누가 알면 욕먹을 일이다.”'“예, 아버님.”'예영이 다시 고개를 살짝 숙이고 밖으로 나오자 마당에서 빗자루 질을 하고 있던 머슴, 돌쇠 놈이 허둥지둥 대며 고개를 푹 숙여 인사를 한다.'“작은 마님, 일찍 일어나셨구먼유.”'“그래, 돌쇠야. 서방님은 기침하셨느냐.”'“아유, 하믄요. 기침이야 했지유. 헌데…….”'예영의 눈치를 살피는 꼴을 보니 또 영락없이 무슨 사단이 벌어진 것이리라. 예영은 절로 나오는 한숨을 억지로 삼키며 서둘러 작은 안채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역시나. 아직 새벽이슬이 채 마르지도 않았거늘 이른 아침부터 조신하지 못한 계집의 웃음소리가 밖으로 새어나오고 있다. 이놈의 개망나니 기질이 나이를 먹을수록 더하면 더하지, 결코 덜하지는 않는구나.'“에잇, 요 앙큼한 계집 같으니라고. 이리 오지 못하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