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흑루 2권

자야가 죽은 이후, 적영궁에는 제법 많은 변화들이 있었다. 가장 먼저 달라진 것은 장진왕과 그 비의 모습이었다. 정상적인 수순으로 맺어지지는 않았을지언정, 그럭저럭 친밀한 부부였던 무원과 하령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져버렸다. 그들은 각자의 처소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예전처럼 함께 후원을 거닐거나 담소하는 일도 없었다. '어디 그뿐일까. 거의 매일같이 제 반려를 찾던 무원은 더 이상 그녀의 처소에서 잠들지 않았다. 며칠에 한 번꼴로 하령의 침소에 들긴 했지만, 잠시 잠깐의 정사만이 전부였다. '정략혼으로 맺어진 여타 황족들이 그러하듯 차갑기 그지없는 관계. 두 사람의 예전 모습을 기억하는 궁인들은 염려 가득한 표정을 떠올렸지만, 윗전의 일에 간섭할 수는 없었다. 그 와중에 자야의 몫까지 대신하느라 허둥대는 자윤의 모습을, 묘하게 침울해진 유아의 얼굴을 눈여겨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밤이 늦은 시각, 침수 들 준비를 하던 하령의 처소에는 낯익은 내관이 찾아와 있었다. 장진왕의 수족과도 같은 적영궁의 최고내관, 자윤이었다. '“비 마마, 전하께서 탕제를 보내셨사옵니다.”'판에 박힌 말을 하면서도 자윤은 불안한 속내를 감출 수 없었다. 자신이 가져온 탕제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장진왕이 어떤 마음으로 그 약을 보낸 것인지 뻔히 알고 있던 그였다. 그간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지켜보았던 자윤으로서는 조마조마할 수밖에 없었다. '젊은 내관은 기도하는 심정으로 숨죽였지만 하령은 표정 없는 얼굴로 탕제를 들이마셨고, 궁녀들이 바친 약물로 입을 헹구었다. 자윤이 참담한 한숨을 삼키는 사이, 그녀가 조용히 입술을 뗐다. '“가서 전하께 본 그대로 전해라.”'“……알겠사옵니다, 비 마마.”'예를 갖춘 자윤은 그 즉시 하령의 앞을 물러나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처소 문이 열리면서 무원이 들어섰고, 충실한 내관은 반사적으로 움찔했다.'“저, 전하…….”'“그만 나가라.”'낮게 가라앉은 무원의 음성은 비단 자윤만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궁인들은 일제히 장진왕과 그 비에게 예를 갖춘 후 처소를 빠져나갔다.'두 사람만이 남은 처소는 무척이나 조용했다. 예전 같으면 가벼운 농이나 인사쯤은 오갈 법도 하건만, 무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침상 옆에 서서 옷을 벗기 시작한 순간, 그는 낮게 가라앉은 음성을 흘려보냈다.'“깨끗이도 다 마셨더군. 그리해야만 했었나.”'“전하께서 친히 보내신 것인데 제가 거절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제는…… 전하께서도 모다 알고 저를 품으실 수 있고, 저 또한 마음 편히 안길 수 있지 않습니까.”'허공에서 맞부딪친 무원과 하령의 눈 속에서 희미한 불꽃이 번득였다. 두 사람 사이에 몰아쳤던 광기 어린 밤과 자야의 죽음이 거대한 폭풍이 되어 지나간 이후, 그들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이것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원망 어린 마음을 품은 채, 장차 태어날 어린 생명을 기피한다는 것. '무원이 하령에게 보내온 탕제에 들어있는 것은 다름 아닌 연잉초 가루였다. 그간 회임을 꺼렸던 그녀를 도발하기라도 하듯, 그는 하령의 침소에 들기 전에는 항상 자윤에게 탕제를 보낼 것을 지시했었다. 그리고 그녀, 그녀는…… 별다른 반응 없이 그것을 마셔버렸고, 제 침소로 찾아온 그를 묵묵히 받아들였다. '비록 몸은 사내와 여인으로 뒤엉킨 채 신음할지언정, 마음만큼은 차갑게 얼어붙어있는 두 사람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그들은 실낱같은 미련을 놓지 못했고, 완벽하게 서로를 미워하지도 용서하지도 못했다. 결국 무원과 하령은 매번 짧은 정사를 끝으로 상처 입으며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사락, 사락. 비단옷자락이 아래로 흘러내리면서 매끄러운 여인의 알몸이 드러났다. 달빛을 등진 하령의 모습은 무척이나 고혹적이었다. 사내를 알게 되면서 더더욱 깊어진 다리 사이의 계곡, 봉긋 부풀어 오른 가슴, 그리고…… 그녀처럼 꼿꼿이 곤두선 분홍빛 유두. '“마다할 이유는…… 없으시겠지요.”'“아마 그럴 거다.”'무려 칠일야를 홀로 보낸 후에야 다시 찾아온 하령의 침소였다. 단번에 나을 수 있는 상처가 아님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녀 안의 가시는 여전히 차갑게 얼어붙은 채 무원의 심장을 찌르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 단 하나뿐인 그의 반려, 그녀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무원은 하령을 안아들고 침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는 주저 없이 자신의 옷을 벗어던졌고, 그녀의 몸 위로 올라왔다. '무수히 많은 밤을 함께 하면서 그녀를 가졌지만 매번 무언가가 부족했다. 여인을 품에 안은 사내의 쾌감과 정욕만으로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 어떤 것. 아마도 이 밤 또한 그 전과 다르지는 않으리라. 그는 하령의 여린 귓불을, 목덜미를 잘근잘근 깨물었다.'“하, 하아…….”

미리보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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