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성 안은 온통 피로 얼룩진 채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성문을 부수고 들이닥친 태하의 황군들은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둘렀다. 그 때마다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허공을 갈랐다.'“사람 살려! 으아악!”'“어서 피하시오! 놈들이 지금…… 흐억!”'사방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 세상 전부를 집어삼킬 듯 타오르는 불꽃, 그리고…… 수없이 죽어가는 자들의 선혈. 제아무리 전쟁 도중 죽고 죽이는 일들이 흔하다지만,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은 가히 생지옥이나 다를 바 없었다. '교룡(蛟龍)이 새겨진 갑주를 걸친 자들은 도망치는 여인과 아이에게도 활을 쏘았다. 어디 그뿐일까. 개중에는 죽은 이의 시신에서 재물을 긁어모으는 자들, 제법 미색이 빼어난 여인을 끌고 가는 자들도 있었다. '‘금수만도 못한 놈들……! 내 차라리 저놈들을 죽이고 나도 죽겠소!’'‘참으시오! 지금 나섰다가는 개죽음 당하오!’ '공공연히 벌어지는 약탈의 광경에 치를 떤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나라가 흔들리면 가장 먼저 위협을 받는 것은 힘없는 백성들이 아니던가. 북양인들은 어떻게든 살기 위해 곳곳으로 숨어들었고, 태하인들의 칼날을 피하고자 발버둥쳤다. '“제국 황실에 불손한 왕과 공주를 생포하라는 명건제 폐하의 명이시다! 황군들은 궁으로 진군하라!”'와아아……! 함성 소리가 도성 안을 가득 메우면서 하늘마저 뒤흔들었다. 살육, 약탈, 그리고 또다시 살육. 황군들은 일제히 궁으로 난입했고, 눈에 보이는 족족 칼을 휘둘렀다. 은빛 섬광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핏줄기가 터져 나왔다. '“북제(北帝)부터 찾아야 한다! 대전을 포위하고 진의환, 그자가 있을 법한 곳을 뒤져라!”'북제, 그것은 동대륙의 북쪽을 지배하는 빙점(氷占)의 왕을 일컫는 칭호였다. 황실 아닌 왕실일지언정 군주를 제(帝)라 일컫는 세 나라, 대연와 이사, 북양 중 마지막인 북양국. 국력이 쇠해가는 지금은 북제라는 칭호도 과거의 영광일 뿐이었지만, 한 나라의 왕인 자를 짐승처럼 몰아대는 모습은 저열하기 그지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이 노리는 사냥감들은 북제 하나만이 아니었다. 진씨 성을 가진 왕족들 중 유일한 여인이자 북제 진의환의 딸, 화연 공주 진하령. 황군들은 일사분란하게 아란궁을 포위했고, 막아서는 자들을 가차 없이 베어버리며 공주를 찾기 시작했다.'“마마! 한시가 급하옵니다! 어서 이 옷으로 갈아입으소서!”'“아바마마는? 아바마마께서는, 무사히 피하신 거야? 대답해, 자야!”'하령은 다급히 그녀의 유모를 향해 캐물었다. 바로 곁에서는 몇몇 궁녀들이 울먹이며 다 낡은 궁인의 옷을 내밀고 있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녀 한 몸의 안전이 아니었다. 왕실의 구심점인 동시에 이 나라의 군주이기도 한 그녀의 아비, 북제 진의환. 그가 무사하지 않다면 그녀가 살아남는다 한들 소용이 없었다. '“아바마마께서 피하지 못하신 거라면…… 나도 가지 않아. 그러니 어서 말해.”'“마마, 실은 그것이…….”'자야가 떨리는 음성으로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 아란궁 밖에서 태하군들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북제를 찾았다! 어서 공주도 끌어내라!”'아바마마……! 하령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하얗게 굳어졌다. 자야를 비롯한 공주궁 궁인들 또한 망연자실한 표정이었고, 그들 중 몇몇은 충격으로 주저앉기까지 했다.'바로 그 때, 굳게 닫혀있던 처소 문이 부서지면서 대여섯 명의 황군들이 들이닥쳤다. 잔인하게 번들거리는 그들의 눈은 단번에 하령에게로 향했다. '“허헛…… 계집 하나 찾는 것이 이렇게 어려워서야.”'“공주라더니 과연 이름값은 하는군. 큭큭…….”'그녀는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비릿한 시선 속에서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어찌할 수 없는 공포, 그리고…… 온몸이 굳어지는 듯한 두려움.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아직 피가 마르지 않은 태하인들의 무기였다. 저 칼날에는 대체 몇이나 되는 북양인들의 생명이 묻어있는 것일까. 아니, 조만간 그녀의 아비와 그녀 또한 저들의 손에 죽게 되지는 않을까…….'바로 그 때, 황군들 중 가장 앞장 선 자가 그녀의 긴 머리채를 잡아챘다.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은 하령이 휘청거리며 쓰러진 순간, 망연히 주저앉아 있던 자야가 달려들었다.'“네 이놈들……! 마마께 손대지 마라!”'“닥치고 늙은 계집 따위는 꺼져!”'퍽……! 제법 거친 소음이 허공을 가르면서 자야의 몸이 바닥 위를 나뒹굴었다. 하령은 머리칼이 모다 뽑혀나가는 듯한 통증 속에서도 제 유모를 돌아보았다. 쓰러진 자야의 머리에서 진득한 피가 흐르는 것을 본 그녀는 다급한 외침을 터뜨렸다. '“괜찮아, 자야? 정신 차려!”'“마, 마마……. 저는, 괜찮으니 부디…….”'“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