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가운 초여름 햇살이 머리 위에서 탱글탱글 여물어가고 있었다. 시끄러운 차 소리에 섞여 간간히 참새들이 울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매년 이맘때 늘 그렇듯 중국에서 황사라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 간간이 찾아왔지만, 오늘만은 한 점의 불길한 그림자도 없는 화창한 날이었다.'그러나 화창한 날과는 다르게 여울의 얼굴엔 검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하얀 캡 모자에 하얀 티셔츠 그리고 청바지를 받쳐 입고 엉거주춤 서 있는 여울에게 산은 소리를 질렀다.'“빨리 오지 못해!”'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것을 주저하는 여울에게 산은 눈을 부라렸다. 그 옆에 해고될 뻔한 경비원이 잔뜩 힘이 들어간 경직된 자세로 거수경례를 붙였다. 하지만 그는 산에게 없는 존재였다. 오직 불어터진 볼을 한 여울뿐.'“약속이 틀리잖아요!”'학원을 다른 곳으로 바꿔달라고 떼를 썼건만 그녀의 말은 듣지 않은 듯했다.'“약속? 난 그런 말 한 적 없거든. 여기서 창피 당할래 아니면 조용히 따라올래.'“가요! 간다고요!”'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화를 내야 하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여울은 복어마냥 잔뜩 부어터진 얼굴로 산을 노려보았지만, 송골매같이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보는 산의 눈초리를 이기지 못했다. 형장에 끌려가는 사형수처럼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여울을 남겨두고 성큼성큼 로비를 빠져나간 산은 잠시 후에 차를 몰고 나타났다. 흰색 람보르기니 V-12, 무르시엘라고 로드스터였다. 여울은 산의 돈 씀씀이에 입이 떡 벌어졌다.'“타!”'산의 명령조에 여울은 비어 있는 검은색 배낭을 뒷자리에 휙 던지고 그가 열어둔 조수석에 올라탔다.'“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어떻게 알았죠?”'“네 입술이 말하고 싶어 죽겠다는 듯 실룩거렸어.”'여울은 반사적으로 손으로 입술을 가렸다. 그리고 산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기에 맞불작전으로 밀어붙이기로 했다. 여울은 호화로운 차 내부를 훑어보며 한심하다는 듯 한마디 던졌다.'“길거리에서까지 돈 자랑을 하세요? 먼저 차는 어쩌고 차를 또 바꿨어요? 혹시 모르는 것 같아 말씀드리는데요, 이 차 한 대 값이면 적어도 몇 명의 소년소녀 가장이 삼시세끼 걱정 안 하고 일 년 내내 발 뻗고 잘 수 있는 거 몰라요?”'따지듯이 묻는 여울을 한번 쓱 쳐다본 산은 자신을 철없는 돈 많은 집 아들로 몰고 가는 여울에게 화가 났다.'“넌 나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어떻게 알기는요. 내가 아는 태산이라는 사람은 금 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덕분에 특별한 직장 없이 놀고먹는 인간이며, 좋은 국산차 놔두고 폼생폼사로 살기 위해 외국 스포츠카 몰고 다니며, 머리는 좋은데 돈이 많아 일할 의욕을 상실한 놀고먹고 사람. 어때요? 퍼펙트한 설명 아닌가요? 딱 오빠죠.”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고 타인의 이야기였다면 분명히 꽤나 한심한 놈이라고 비아냥거렸겠지만, 산은 끓어오르는 흥분을 가라앉혀야 했다. 사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긴 했다. 아무리 머릿속을 뒤적거려보아도 딱히 자신의 인생철학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리고 설명을 제대로 했다 쳐도 여시의 웃음거리가 될 게 뻔했다. 산은 가장 간단한 말로 짧게 설명하기로 했다.'“그게 뭐가 나쁘냐? 실업률이 상향곡선으로 치솟는 요즘에 나 같은 사람까지 끼어서 한자리 차지해봐! 나 때문에 한 사람이 실직자가 된다는 생각은 안 해봤냐? 그리고 내가 돈을 안 쓰면 경제가 어떻게 돌아 가냐? 돈은 사람들 손과 손 사이로 돌아다녀야 하는 거 아니겠니?”'가만, 그런데 내가 화를 내야 할 상황 아니었나? 여시의 말은 그가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영혼이라는 말이었다. 산은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주름 잡힌 얼굴로 여울을 돌아봤다. 어느새 주도권이 여울에게 넘어간 것을 깨달았다.'“너 머리 좋다, 상황 반전시켜 놓고. 지금 화내고 있어야 할 사람은 나거든!”'오피스텔을 나올 때만 해도 할 말이 많은 사람은 그였다. 차를 타기까지 교과서를 함부로 버린 여울을 입도 벙긋 못하도록 꽉 잡았었다. 그런데 여시의 몇 마디에 가장 나태한 영혼으로 전락한 그였기에 대놓고 야단을 치기가 민망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고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어떻게 학생이 책을 버릴 수 있니? 넌 입이 두 개라도 할 말 없어. 아무리 내가 한심한 영혼이라도 너보다 가방끈은 길다. 가난해서도 아니고 놀다가 잘린 너보다는 내가 조금 낫거든!”'씩씩거리며 콧김을 내뿜으며 당당했던 산의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버린 게 아니라니까요! 이사 올 때 깜박 잊고 놓고 왔다고 말했잖아요. 그건 불가항력이었다고요. 그리고 가방끈만 길면 뭐해요? 그 좋은 표본이 오빠잖아요, 백수 태산! 제 생각은 그렇거든요, 책상에서 배운 단순한 지식과 몸으로 부딪혀 경험한 산지식과는 엄청난 차이라고. 전요, 남들보다 한발 앞서 사회경험을 쌓고 있는 중이었거든요. 옛날이나 배움에는 때가 있는 거지, 요즘은 아니라고 봐요.”'왜 내 말을 믿지 못하냐는 듯 답답해하는 여울에게 산은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라는 듯 크게 웃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