왔다!'여울은 싸늘한 눈매로 저 멀리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창피해서 죽는 줄 알았다. 물 한잔 시켜놓고 1시간 가까이 홀로 앉아 있는 그녀를 흘끗거리는 커피숍 직원들 때문에 시계를 몇 번이나 쳐다보았던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듣고 있던 구둣발 소리가 그녀 앞에서 멈추었다. 머리 꼭대기에 화덕을 얹어놓은 범인이 마침내 등장한 것이다. 너 오늘 죽었어! 1분도 아니고 1시간 가까이 그녀를 기다리게 한 남자의 잘난 얼굴을 똑바로 노려보며 수치심을 안겨 주리라 다짐하며 여울은 분노를 삭였다.'“워낙 차가 막혀서…….” '‘미안하다든가 죄송하다든가’라는 사과의 말없이 대뜸 차가 막혔다는 남자의 예의 없는 변명에 코웃음이 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부글부글 끓는 머리로 남자의 턱을 과격하게 박고 바람과 같이 사라지고 싶었다. 하지만 조부 친구의 손자라는 이유로 없는 인내심을 발휘해서 꾹 참았다. 내 몰골을 보면 저 예의 없는 놈도 10분 이상은 앉아 있지 못할 거야. ‘예쁜 내가 참는 거야, 착한 내가 참는 거야’라고 스스로를 다독거렸다.'“시간 맞춰 온 제가 잘못이지요, 뭐.”'삐딱하게 말한 여울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활짝 웃으며 일어섰다. 그런데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본 순간, 활짝 웃던 그녀의 입매가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오마나! 저게 29살 얼굴이야! 얼꽝 폭탄 수류탄 등 다양한 말을 들었지만, 눈앞의 남자는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29살이라고 우기는 틀림없는 40살 아저씨였다. 정확히 56분 늦은 걸 용서하고픈, 모든 죄를 사하고픈 마음이었다. ‘차라리 나오지나 말지’라고 대놓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외모지상주의인 이 시대에 그녀만이라도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기 이전에 대화를 나눔으로써 상대방에 대한 진정한 모습을 찾아야 하겠지만 태어나 처음으로 99.9% 안 생긴 남자와의 대면인지라 당황스러웠다.'“예전 여자친구를 떼어놓고 오느라고 늦었습니다.”'꼴에! 아니야, 안 돼. 이 사람이 ‘저따구’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건 아니잖아. 유전적인 결함일 뿐이야. 백여울, 무시하지 말자. 측은지심을 발휘해야 해. 여울은 미디어에 푹 젖은 편협한 마음을 애써 다스렸다. 그런데 한 가지, 여울의 마음을 끄는 게 있었다. 목소리였다. 목소리만은 매력적이었다. 생김새와는 전혀 다르게 확실하게 샤프했다. 시력에 문제가 있다면 남자를 왕자라고 생각하며 한평생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녀 시력은 양쪽 모두 1.5였다. 자식, 목소리만큼 외모가 따라 주었으면 금상첨화인데. 아쉽다, 아쉬워.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으면서 여울은 진짜, 정말로 아쉽다는 듯 입맛을 쩝쩝 다셨다. '“예쁘지도 않으면서 어찌나 찰거머리처럼 달라붙는지 한 시간 늦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입니다.”'“네에.”'컥! 이건 무슨 도끼병! 그녀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매력이 남자에게 있을 수 있겠지만, 순식간에 콧구멍에서 김빠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야, 인마! 어느 여자가 네 외모를 보고 졸졸 쫓아다니겠냐. 네가 가진 배경 때문에 쫓아다녔다는 생각은 할 수 없니? 네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고 제발 그 소름끼치는 도끼병에서 완쾌하기 바란다. '“쫓아다니는 여자 분도 있으시고 인기가 많으시네요.”'여울은 대놓고 비아냥거렸다.'“만나는 여자들마다 결혼하자고 졸라대는 통에 아주 미치겠습니다.”'나는 절대 조르지 않을 테니 걱정 붙들어 매라. ‘그 인물에 너 좋다고 하는 여자 있으면 얼씨구나, 하고 장가가야지 꼴에 차기까지’라고 쏘아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여울 씨도 설마 결혼하자는 말을…… 그러면 곤란한데.”'설마 농담이겠지! 그런데 남자의 표정은 진지했다. 진짜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는 그의 이마에는 굵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여울은 가능한 천진스러운 웃음을 지어보이며 생각했다. 네놈 이마에 잡힌 주름보다 더 분명하게 난 너와 네버, 네버 결혼할 생각 없거든! 한마디로 남자를 표현한다면 ‘밉살스러운 왕 재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