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살랑거리며 검붉어 물든 높은 하늘. '시간보다 빨리 붉은 기운도 전부 빠져나간 검은 하늘 위에는 별이 한두 개씩 촘촘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지상의 열기가 채 식지 않은 땅 위에서는 단꿈 같은 여름밤을 즐기는 청춘 남녀들의 열기가 후끈 식어가는 공기를 달궈놓고 있었다. '원주민들과 함께 어우러지기 시작한 리조트 손님들의 환호성이 시원한 밤하늘에 소용돌이치듯 크고 넓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들의 행복이 질투 나는 듯, 자신이 즈금 한심한 듯 유이는 작은 한숨과 함께 힘없이 고개를 돌리다가 문득 한 남자와 우연히 시선이 마주쳤다. '리조트의 투숙객인 것일까? '아니면 라투아나 섬의 사람일까?'다갈색으로 햇볕에 잘 그을린 커다란 키의 백인 남자 하나가 그녀를 호기심 있게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과하게 부풀어 오른 근육을 과시라도 하듯 양 팔을 조이는 하얀 셔츠는 두툼한 가슴팍이 잘 보이도록 거칠게 풀어져 있었다. '그 남자가 빙긋 웃으며 눈인사를 건넸으나 유이는 쌀쌀맞게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시선을 돌리자, 그 남자의 등 뒤로 보이는 멀지만 낯익은 실루엣에 미간 사이를 잔뜩 찡그렸다. 그리고 피하듯 다시 고개를 돌리자 다시 백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잠시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던 유이가 생긋 웃으며 몸을 부스스 일으켜 세웠다.'그리고 무슨 생각인지 기대있던 테이블에서 몸을 움직여 돌연 화장실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화장실 안의 간이 탈의실로 들어간 그녀는 아직 더운 열기에 붉은 뺨을 물로 적신 후 거울을 바라보았다.'한참 뚫어져라 거울 속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이가 크로스로 매고 있던 작은 가방에서 바쁘게 메이크업 도구를 꺼냈다. '파우더를 꺼내 붉은 얼굴색을 고치고 아이라인을 좀 더 짙게, 다시 거울을 보고 좀 더 짙고 스모키 하게. 마스카라를 짙게 칠한 뒤 한 뒤 립스틱을 꺼내 들었다. '핑크빛 립스틱과 펄이 반짝이는 유혹의 붉은 립스틱 중에서 망설임 없이 그녀는 붉은 립스틱을 집어 발랐다. '말라있던 창백한 입술이 순식간에 꽃물을 들인 양 붉게 베어 들었다. ‘'마무리로 단정하게 하나로 땋아 묶어 올렸던 머리는 한 번에 풀어 흩트리듯 헤쳐 놓았다. 잘 땋아 놓았던 머리카락들이 살아있는 듯 굽슬 하게 엉킨 채 붉은 립스틱과 함께 큰 효과를 발휘했다. 삽시간에 말도 안되는 섹시한 여자가 거울 안에 들어서 있었다.'제법 마음에 드는 듯 요모조모 뜯어보던 그녀는 뭔가 어색한 듯 꼼꼼히 거울 안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아.”'문제점을 금세 발견한 듯 걸치고 있던 카디건을 벗어 버리고 무릎에서 찰랑이던 얇은 천을 사납게 잡아 뜯어 버렸다. 쉬폰의 가녀린 천은 매끄러운 소리와 함께 찢겨져 나갔고, 슬리브리스 원피스는 허벅지를 아스라하게 노출한 야한 칵테일 드레스로 변신했다. '마치 팜므 파탈이라도 된 듯 그녀는 맵차게 거울을 향해 비웃듯 미소 지은 뒤 휘청휘청 화장실을 나왔다. 다시 앉아 있던 자리로 그녀가 되돌아갔다. 바텐더에게 실험적으로 말을 건네 보았다. '“칵테일 한 잔. 마르가리타.”'징긋. 장난치듯 웃어 보이며 그녀가 살짝 몸을 숙이며 바텐더를 바라보자 술을 건네던 바텐더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그녀의 얼굴에서 가슴까지 단 한번에 시선이 떨어졌다. 동그랗고 풍만한 가슴골이 위험한 슬리브리스 원피스 앞섬에서 아찔하게 유혹하듯 드러나 있었다. '아까부터 유이를 주시하고 있던 백인 남자도 그녀가 화장실에서 나와 야외 바 앞에 앉을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살짝 고개를 돌려 그녀가 살며시 웃자 마주친 눈이 게슴츠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작은 탄성처럼 작은 휘파람 소리가 새어 나왔다.'그녀는 칵테일 잔을 들어 올리며 그를 향해 입 모양으로 ‘cheers’라고 말했다. 서비스처럼 그에게 ‘찡긋’ 사랑스럽게 윙크 해 주었다. 초대라도 하는 듯한 그녀의 눈인사에 백인 남자가 느끼하게 웃으며 어슬렁어슬렁 유이의 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줄리언, 저 마드무아젤……. 당신의 한 달짜리 애인이 아닌가?”'“뭐?”'저녁 내내 잔뜩 굳은 얼굴로 파티 장을 체크하듯 돌다가, 잔뜩 미간을 찡그린 채 맥주병을 집던 케이가 라울의 말에 그가 손짓하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라울의 손끝이 멈춘 그곳에 있는 낯익은 실루엣. 케이의 시선도 멈추며 경직되듯 딱딱하게 굳어 내렸다.'언뜻 언뜻 감질나게 보이는 실루엣이 또렷해지자 입에서 저절로 욕지거리가 나왔다. '“대체 뭐가……. 이런 젠장.”'인파에 묻혀 보일 듯 말 듯 그녀의 모습을 쫓던 케이가 사납게 맥주병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험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무언가 잘못 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유이를 닮은 다른 여자를 착각한 것 같았다. '그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요염한 모습. 이 달밤에 누굴 희롱하려고 나타난 요정인 듯 싶었다. 스모키 한 화장이 덧대진 눈이 차갑고 서늘하게 빛나 고혹적인 눈빛은 평소와 또 다른 느낌으로 남자의 가슴을 요동치게 하고 있었다.'가슴과 허벅지의 굴곡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미니 드레스에, 피처럼 붉게 베인 입술과 검은 라인으로 과장된 눈빛. 그리고 헤프게 풀어 헤쳐 흐트러지고 엉킨 긴 머리카락…….'케이는 다시 욕설이 튀어 나오려는 입술을 쥐어짜듯 억세게 베어 물었다. '그만 보는 모습이라면, 당장 그녀를 안아 들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을 테지만, 만인이 보는 이곳에서 그런 모습이란!'입술 색은 리조트의 쥐들을 수 마리는 잡아먹은 것 같았다. 조금만 몸을 숙여도 다 보여 질 것 같은 아슬한 가슴과 다리. 맥주병을 부서질 듯 움켜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려오고 있었다.'그러나 그녀에게 화가 나 있다는 것도 잠시 잊을 정도로 매혹적이고 야성적인 뒤태에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다른 남자들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불쾌하고 불안했으니까.'그녀를 지금 이 안의 수많은 시선들 속에서 차단 시켜 버리고 싶었다.'케이, 그 안의 소유욕과 남성 특유의 욕심이 그를 화나게 하고 안달 나게 했다. '그러나 몇 발자국 떼기도 전에 백인 남자 하나가 건달처럼 건들건들 그녀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화석처럼 그 자리에 굳은 채 서 버린 그의 미간에 몇 겹이나 더 불쾌한 주름이 깊게 패였다. 낯선 남자 곁에 바짝 다가앉아 바람인 듯 낭창하게 미소 지으며 칵테일을 마시고 깔깔 웃는 여자는 그의 마드무아젤이 아니었다. '서지도 앉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못하며 그는 몹시 불쾌하고 복잡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호 아주 멋진데. 저렇게 섹시한 줄 알았으면 내가 먼저 대시해 볼걸.”'케이의 곁에서 염장을 지르듯 라울이 몇 번이나 감탄을 하며 유이를 함께 바라보았다.'“라울.”'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케이가 부드럽게 라울의 이름을 불렀다.'“응?”'“당신 내일부터 해고야.”'라울이 내내 감탄하면서 반쯤 벗은 유이의 몸을 훑어보는 것 같아 케이는 으드득 이를 깨물며 그의 눈을 사납게 가려 버렸다.'“아름다운 걸 아름답다고 하는데 그렇게 말할 것까지야.”'케이의 손을 떼 내며 약이라도 올리는 듯 라울이 싱글싱글 웃으며 그를 놀렸다. '케이가 라울과 잠시 아웅 거리는 사이, 유이의 주변을 돌던 붉은 머리의 남자가 바짝 그녀의 앞에 다가섰다. 마주 선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주는 그 남자의 손길을 따라 움직이던 케이의 시선이 점점 더 차갑게 얼어붙는다. 부셔버릴 듯 맥주병만 움켜 쥔 손이 하얗게 떨려왔다.'그 차가운 분노가 그녀에게도 닿은 것일까? 생긋 웃으며 그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던 유이가 힐끗 눈동자를 굴려 그를 바라보았다. 스치듯 잠시 케이와 마주친 검은 눈동자가 곧 새침하게 다시 시선을 돌려 마주 선 이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올려놓았다. '최유이, 지금 나를 자극시키려는 건가? 아님 화나게 하려는 건가?'당장 달려 가 그 남자의 턱이라도 날려 버릴 듯 주먹을 움켜쥐고 있던 그가 팔짱을 끼며 인상을 썼다. 우습다는 듯 입가에 일그러진 냉소가 그려졌다. 유이에게서 야멸 차게 시선을 돌려 버렸다. '두 사람 사이에 뛰어들어 홍해 가르듯 쫙 갈라놓고 싶었다. '유이의 흐트러진 머리끝을 만지작거리는 그 손가락을 한 마디씩 똑똑 분질러 주고 싶었는데. 헛헛한 속에 케이는 들고 있던 맥주병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주변을 둘러보던 케이의 시선에 그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던 실버 블론디의 8등신 미녀와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 생그레 그녀가 초대하듯 웃는다. 맥주병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케이는 망설임 없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가 자신 쪽으로 다가오자 그녀 역시 살며시 그가 오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