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말의 여느 때와 같은 아침이었다. 7시가 되기 조금 전의 시각인지라 아직 학교 안은 조용했다. 계단을 올라가는 태희의 발걸음은 경쾌했고, 손에 쥔 따뜻한 커피 캔을 볼에 댈 때에는 살포시 미소까지 떠올랐다. '아무도 없는 아침의 학교가 정말 좋다고 중얼거리면서 교실에 도착해 열쇠를 끌러 안으로 들어간 후 태희는 곧장 운동장 쪽 창가의 제일 뒷자리에 가방을 두었다. 가방에서 책 한 권을 빼 바로 앞자리 책상 위에 올려두는 것도 잊지 않고.'보통 때보다 20여분 정도 일찍 등교한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오늘은 담임선생님의 지시로 자리를 바꾸게 된 날이다. 2학년이 된 직후, 그 수가 적은 편인 문과반은 서로가 낯선 애들로 반이 구성되어 초기의 서먹서먹한 정도가 거의 고교 입학한 직후와 같았었다. 시간이 꽤 지나도 반 애들은 주변자리 애들끼리만 친하게 지내는 경향을 보였고, 특히 그것은 남자와 여자의 이분이라는 원칙 하에서였다. 으레 그러는 것처럼 남자 여자로 나누어 분단을 만든 결과가 그런 식으로 나타나자 담임선생님은 결국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자유롭게, 등교하는 순으로 원하는 자기 자리를 정하되 반드시 남녀 짝을 이루라는.'마침 반 인원도 남녀가 각각 절반씩이라 예외 따윈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월요일의 HR시간에 반에 내려진 이 제안(이라기보다는 명령)으로 불만스런 술렁임이 일기는 했으나, 선생님의 의지는 단호했다. 일 년 남짓 동안 가족보다 더 자주 볼 얼굴들끼리 친하게 될 기회를 주겠다는데 토 달지 말라며 일은 그렇게 결론이 났다.'그래서 태희의 반은 오늘 자리교체를 하게 된 것인데 과연 얼마만큼이나 효과를 낼지는 두고 보면 알 일이다. 딱히 이렇게 한다고 해서 교육방송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화기애애한 반은 되지 않을 거라는 게 분명한데도.'아무튼 선생이란 직업도 참 귀찮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태희는 단짝친구인 소희의 자리를 맞춰두고 나서 커튼을 열어젖히고 창문을 열었다.'소희 자리까지 가서 단정하게 커튼을 끈으로 정리하고 있는 태희의 모습은 반애들이 본다면 매우 이상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같은 반이 된지 불과 며칠 만에 반 애들 거의 모두에게 ‘차갑다’라는 인상을 심는데 성공해서 이젠 누구도 그녀에게 말을 거는 일이 없어진 이래, 태희에게 붙여진 꼬리표는 ‘건방지고 깔끔떤다’는 것이었다.'성격은 둘째 치고 그런 인상을 심게 된 가장 큰 이유엔 외모를 빼놓을 수가 없을 것이다. 허리에 닿을 만큼 길고 결이 좋은 까만 머리. 조금만 더 하얀 빛을 띠었다면 병색이 완연하다는 말까지 들었을, 건강함과는 거리가 먼 창백한 얼굴. 쌍꺼풀은 없지만 시원스런 눈매와 코. 갸름하고 얇은 입술은 조금만 미소를 짓는다면 청순하게도 보일 미인형이었다.'태희 본인은 그런 자신의 모습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이 거의 전무한 편이었지만, 주변의 사람들마저 그런 면에 무심한 건 아니다. 고등학교라는 좁고 폐쇄적인 울타리 안에서 매일 마주 대하게 되는 얼굴들. 특히 공부가 중심이 되는 우등생들의 학교라는 특성에도 불구하고 그 또래 아이들의 보편적 관심사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학교에 얽매인 자신들과 달리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아이돌 스타에 대한 선망을 갖고, 그런 꾸며진 아름다움을 미의 기준으로 여겨 추종하게 되기도 하지만 결국 그들은 스타일 뿐 손에 닿는 존재가 아니다. 때문에 학교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몇 명의 눈에 띄는 외모의 존재가 준거집단이 되어 미인의 실례로서 입에 오르내리게 된다.'윤태희는 그런 집단에 속한 경우였다. 단지 본인이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는 자신이 매우 평범하고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산다고 여기는 모든 행동들이 예의 그러한 평가를 받게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태희와 친해지게 된 초기에 소희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넌 아무래도 손해 보는 성격이라고.'그 말을 별 생각 없이 웃어넘긴 태희지만, 설사 설명을 들었다 해도 별수 없는 일이었다. 소희 말대로 태희는 손해 보는 성격인 것이다. '반 애들이 점차 교실로 들어오고 있다. 7시 20분을 조금 넘겼을 때쯤엔 절반 정도의 애들이 도착해 교실 안은 두런거리는 반 애들의 목소리로 조금 번잡해졌다. 아직 남자애들이나 여자애들이 짝을 이루는 일이 없이 빈자리를 찾아 앉고 있지만 시간이 좀 더 지나면 곤란한 얼굴을 한 애들이 생겨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