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XX년, 예술의 전당.''얼굴의 반을 가릴 정도로 모자를 푹 눌러쓴 한 여자가 예술의 전당 안으로 들어왔다.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리는 천재 피아니스트 ‘하유신’의 첫 국내 독주회가 열리는 날임에도 그 안은 지나치게 한산했다. 너무 일찍 온 탓일까? 의구심이 들었지만, 그녀는 독주회가 열릴 콘서트홀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를 직접 만날 수는 없지만 6년 전에 듣지 못했던 그 곡은 들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분명히 그는 그 곡을 연주할 것이다. 자신과의 약속을 잊지 않았다면 말이다. 긴장해서 그런지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한 그녀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하지만, 홀 안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홀린 듯 무대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독주회가 열릴 곳이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그곳에 존재하는 것은 검은 그랜드피아노를 감싼 고요한 적막과 어둠뿐. 그녀는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설마 날짜를 잘못 안 것일까? 그럴 리가 없었다. 그랬다면 이 안에 들어올 수도 없었으리라. 그렇다면 혹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낌새를 느낀 그 순간, 어디선가 조명이 켜졌다. 태양보다 더욱 밝은 빛. 눈이 부셨다. 갑작스럽게 자신을 향해 쏘아 내리는 환한 불빛에 놀란 그녀는 순간적으로 눈을 감았다.''“아아, 놀랐나 보군.”''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여자는 손으로 빛을 가리며 부신 눈을 힘겹게 떴다. 무대 안쪽의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185cm가 넘는 큰 키에 어울리는 고급스러운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백옥같이 하얗고 부드러워 보이는 피부, 천연으로 프러시안 블루 빛이 도는 검은 머리칼. 눈매는 전보다 더 날카로워졌지만, 사파이어를 박은 것처럼 아름답고 신비한 두 눈동자는 여전했다. 그가 이토록 매혹적인 푸른 눈동자를 지니고 있음을 아는 이의 수는 극히 적지만 말이다. 긴 속눈썹 아래로 조각이라도 해 놓은 듯 곧게 뻗은 콧날을 지나 붉은 입술로 떨어지는 황금 비율의 완벽한 외모. 조명 사이로 점점 드러나는 그의 얼굴을 확인한 그녀는 온몸에 전율을 느낄 정도로 소스라치게 놀랐다.''“하유신? 어, 어떻게?”''“인제 그만 지겨운 숨바꼭질을 마무리 지을 때가 된 것 같아서 말이야.”''“유, 유신아. 나는 그저…….”''“조용히 내 연주만 듣고 갈 생각이었겠지. 안 그래?”''여자에게 시선을 떼지 않으며 한 발자국씩 천천히 다가오는 남자의 눈동자 안에선 분노로 말미암은 푸른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그녀의 망막에 맺힌 그의 모습이 점점 가까워졌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은 하늘을 찔렀지만, 너무 당황했는지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바짝 긴장해서 잔뜩 몸을 움츠린 그녀의 바로 앞에서 그가 걸음을 멈췄다. 보이지 않는 경계가 그어졌다. 만약 그녀가 그를 피해 한 발짝이라도 뒤로 물러선다면 이 위태로운 경계가 산산 조각날 것만 같았다.''“내가 처음에 분명히 경고했지? 감당 못할 거면 처음부터 건드리지 말라고. 네 멋대로 내게 감정이란 것을 심어 놓고 말도 없이 사라져서 6년 동안 나타나지 않다니, 숨바꼭질이 너무 지나쳤어. 덕분에 원치도 않은 술래가 되어야 했으니까.”''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짧은 침묵을 깨고 그가 이빨을 드러낸 성난 맹수처럼 으르렁댔다.''“유신아, 난 너를 위해서…….”''“나를 위해서 내 곁에서 떠났다. 이건가? 하, 웃기지 마.”''쏟아지는 그의 차가운 눈빛이 온몸을 마비시켰다. 하지만, 여자는 차분하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침착해야 한다.''“이미 6년도 더 된 일이야. 우리가 함께했던 그때 그 시간은 이미 한때의 추억일 뿐이야. 인제 와서 돌려놓을 수도 없고, 돌리고 싶은 마음도 없어.”''“추억이라고? 그래. 그때의 기억들은 내 삶에서 아주 작은 일면에 지나지 않겠지. 하지만, 그 기억의 아주 작은 조각들이 나를 지배하고, 나를 미치게 해! 그리고 결국, 파멸에 이르게 만들겠지.”''그의 검푸른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뭐, 이젠 됐어. 이렇게 다시 만났으니까.”''위험하다. 남들은 보통 눈치 채지 못하지만,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이토록 동요하는 것은 극히 화가 났다는 뜻임을. 두려워진 그녀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둘 사이를 가르고 있던 보이지 않는 경계가 깨졌다. 그래. 이건 그녀가 자초한 일이다. 그의 입 꼬리가 시니컬하게 올라갔다.''“그러고 보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억누르지 말라고 가르쳐 준 것도 아마 너였지?”''“하, 유신아! 읍!”''뒷걸음치는 그녀를 다짜고짜 낚아챈 그는 두 팔 안에 그녀를 가둔 채 거칠게 입을 맞췄다. 예상치 못했던 그의 돌발적인 행동에 당황한 그녀는 마치 그의 키스를 환영하듯 입을 벌리고 말았다. 그새를 놓치지 않고 그의 혀가 공격적으로 그녀의 입 안을 배회했다. 숨을 쉴 틈이 없이 깊게 이어지는 진한 키스에 호흡을 잃은 그녀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흡, 그, 그만. 쿨럭. 숨 막혀, 유신아. 흡, 그만. 아파, 아프단 말이야!”''가까스로 입술을 뿌리친 그녀가 절규 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하지만, 그는 끈질기게 다시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몇 번의 딥 키스가 더 이어진 후에야 어느 정도 이성을 찾은 그는 그녀가 도중에 호흡할 수 있도록 배려하며 자잘하게 입을 맞추었다.''“이 정도로 아프다고 해선 안 되지, 은하예. 네가 내 앞에서 사라진 후부터 나는 지옥의 화염 속에 떨어진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으니까.”''그는 그녀의 아랫입술을 살짝 베어 문 채 중얼거렸다.''“실수는 한 번뿐이야. 더 이상은 놓치지 않아, 나의 마드무아젤.”''그녀가 도망칠 수 없도록 더욱 꽉 끌어안는 그의 두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그래, 실수는 한 번뿐이다. 지금이라도 당장 되돌리고 싶은 6년 전, 그때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