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갑니다.”'“가!”'“안 가요!”'개와 고양이의 공방처럼 다 큰 손자와 기력이 짱짱한 할아버지가 서로를 노려보며 누구 목소리가 더 큰지 겨루기라도 하듯 목소리를 최대치로 높였다.'귀한 백자 화병 영감은 하얗고 깨끗하며 매끄럽기 이를 데 없는 옥 같은 피부에 부딪히는 진동에 부르르 몸체를 떨었다. 자칫 잘못 걸리면 와장창 바닥에 메다 꽂히거나 저 높은 하늘을 향해 공중 부양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 그 즉시 사망일 게 뻔했기에 백자 화병 영감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숨을 죽였다.'거실에는 비슷한 처지에 있는 동료들이 많았다. 저기 꼴딱꼴딱 숨을 삼키며 혹시라도 누군가 전화를 걸어 요란한 벨 소리가 울리지는 않을까 끙끙거리고 있는 목재 전화기 양반. 소리가 커지기 전부터 나긋나긋한 가죽 소파 양의 가슴 한쪽에 소복이 모여 있던 복슬복슬한 쿠션 군들. 평소 물 건너왔다고 큰 소리를 뻥뻥 쳐대던 버릇없는 협탁 놈은 항상 자랑하던 구부정한 다리를 달달 떨어 가뜩이나 불안에 투명하게 질려 있는 어린 유리 꽃병 처자의 가슴을 더욱 쫄게 만들었다.'저런, 병신 같은 놈! 평소 큰소리치던 뱃심은 다 어쩌고 저 모양인지.'그나마 이 중에서 제일 든든하게 버티고 있는 것은 저 무시무시한 혈전의 한복판에 턱 하니 자리하고 있는 네모난 탁자 군뿐이었다.'내 저 탁자 군이 들어올 때부터 한눈에 척 알아봤지. 그동안 벌어졌던 수많은 피 튀기는 전장 속에서도 꿋꿋이 견뎌내더니, 지금도 보시라.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묵묵히 자리를 잡고 있지 않은가.'그렇게 백자 화병 영감이 거실 물건들에 대한 품평을 끝냈을 때쯤, 그 잠시의 시간도 밀리지 않으려고 서로 간에 치열한 눈싸움을 하며 다음 판을 위해 숨을 고르고 있던 손자와 할아버지가 다시 목청을 틔우며 맞붙었다.'“가라면 가! 어디 한 군데 나무랄 데 없는 자리야. 오히려 너한테는 아까운 자리란 말이닷, 이놈아! 아니면 어디 굴다리 밑에 가서라도 네 놈 짝을 데려오든지.”'“아직은 생각 없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대체 선은 무슨 선입니까? 그렇게 아까운 자리면 할아버지가 대신 나가시던지요!”'갑작스럽게 본가로 호출 당해 끌려오다시피 온 상혁은 채 숨을 돌리기도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라고 했던가.'젠장, 붙잡으러 온 인간들 숫자가 하나만 모자랐어도 충분히 도망칠 수 있었는데. 그동안 회사 일이 많아서 운동을 좀 게을리 했더니 실력이 떨어졌나.'“인석아! 내가 열 살만 젊었어도 이렇게 나서지 않아!”'행여나, 그러셨을까.'하긴 10년 전까지만 해도 다른 사촌 형제들이 모두 미혼이었기에 자신에게까지 할아버지의 결혼 성화가 미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그 방패막이들이 요 몇 년 새 차례차례 사라져버려 지금은 그야말로 허허벌판, 할아버지의 집중 과녁이 되어 버린 것이다.'게다가 마지막 남은 한 명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다른 형들보다 더 집요하게 쪼아대시는 것이 정말 두 손 두 발 다 들어야 할 형편이었다.'차를 내오는 가정부 아주머니의 입가에 애써 참고 있는 듯한 웃음기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주인어른이 집에 계실 때마다 치러지는 정기 행사 같은 조손(祖孫)간의 말다툼이었기 때문이다. 상대하는 손자들만 다를 뿐, 오가는 레퍼토리는 매번 동일했고 손자들의 반응도 하나같이 똑같았다.'“만약 네놈이 그 자리에 안 나가는 사태가 발생할 시엔…….”'오싹 소름이 돋을 만큼 낮은 목소리로 뒷말을 흐린 할아버지는 공포감을 조성하듯 마지막 협박을 던졌다.'“그 뒷일은 나도 책임 못 진다.”'다음 날, 상혁은 할아버지의 명대로 맞선 자리에 나갔다. 나가긴 나갔지만…….'그날 저녁 김 회장은 집안이 떠나가라 고함을 질렀다.'“이놈의 자식! 이 때려죽일 놈!”'그날 백자 화병 영감을 비롯한 거실 물품들 중 살아남은 물건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소문이 돌았다.'겨우 살아남은 것들의 전언에 의하면 이놈의 집구석은 절대로 자신들 같은 연약한 것들이 있을만한 곳이 못된다나, 어쨌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