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훨씬 먼 곳에서 전철 오는 소리가 들렸다.'귀를 아프게 하는 경적소리도 아직 들리지 않았고 지나치며 혼을 빼놓는 시끄러움도 좀처럼 스치지 않는다. 바람조차 스치지 않는 차가운 공기 아래 검은색의 정장을 입은 사내는 무심하게 바닥을 내려 보다가 몸을 돌렸다.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순간 올가미처럼 매달린 그 흔적을 가지고서 살짝 구두 굽으로 전철 라인을 따라 세워진 방음벽 위를 톡 건드렸다.'어쩌면 지금 이것은 최후의 발악, 쓸모없는 자존심일 수도 있다.'흰 입김사이로 무던히도 가라앉은 눈이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로 흩어졌다. '어쩌면 지금 이것은 마지막 추위에 보답하는 스스럼없는 한숨일 수도 있었다.'긴 시간을 보내왔던 그에게 마지막 밤은 시리도록 차가웠고 가슴 아프도록 매서웠다. 두 손으로 검은 타이를 고쳐 맨 서영은 먼 곳에서 다가오는 전철의 빛에 자신이 비출까 방음벽의 뒤로 가볍게 뛰어내렸다. 발이 닿는 소리도 없이 바닥에 내려 허공을 보는 눈은 씁쓸했다.'하나 둘 스스로가 사라진다는 게 느껴지는 건 무척이나 불쾌한 것이었다. 걸음을 걸을 때마다 검은 하늘에 반사된 초연한 은사(銀沙)가락의 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며 조금 더 사람의 흔적이 없는 곳으로 향했다.'최후를 맞이하기엔 다소 아쉽지만 괜한 시끄러움은 그로써도 원치 않는다. 애석하게도 은사 스스로도 물에 녹은 듯 사라지고 그 빛나는 네온사인의 작은 빛 자락 하나 들지 않는 어두운 골목 사이로 들어간 그는 쾌쾌한 냄새에 쓰리게 웃었다.'“이것 참.”'그와 아주 잘 어울리는 구석 자리에 서서 더러운 벽에 기대어 손을 뻗었다. 달조차 없는 어두운 골목 사이에서도 똑똑히 보일정도로 그의 손가락, 손마디, 손바닥 모두 투명했다. 검은 하늘이 보일정도로 투명해진 손으로 꾸물꾸물 얼마 남지 않은 혈액이 겨우 움직인다.'정말 끝이다. 이제 정말로 끝이다.'심장이 터질듯 쿵쾅쿵쾅 움직이고 더 없이 침착했던 그의 눈가에 핏발이 돋아났다. 가까스로 유지되던 몸이 정말 바스라 질듯 균열을 이루고 그 아래로 슬프게도 흰 모래알들이 우울하게 흩어져 내렸다.'“흡.”'숨을 막은 괴로움에 두 손으로 목을 잡고서 눈을 부릅뜬 서영은 안녕을 고하는 스스로의 몸으로 조용히 눈을 감는데 그런 그의 머리 위로 묵직한 뭔가가 내려졌다. 그리고 그것은 더듬더듬 비단 실타래만큼이나 부드러운 그의 검은 머리카락을 자꾸 더듬었고 이내 지나치게 매혹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응? 여기에 이런 것도 있었나?”'사람의 애간장을 녹일 만큼 야릇하고도 매력적인 그 목소리에 타는 고통이 있다는 것도 잊은 서영이 몸을 조금 움직이자 금방 균형을 잃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어, 어!’하는 다급한 외침과 함께 아래로 미끄러졌다. 반사적으로 두 팔을 뻗어 그 장본인을 거뜬히 받쳐버린 그는 코를 찌르는 향에 침을 삼켰다. 어리둥절하게 눈을 크게 깜빡이며 있는, 그 여자를 빤히 보던 서영은 그녀의 얼굴 가까이 들린 손바닥에 난 생채기로 흐른 맑은 핏방울에 팔에 힘을 주었다. '본능에 가입 된 그의 검은 눈이 차츰 떨리며 당황해서는 아무 말도 못하는 그녀의 손바닥으로 고개를 내렸다. 아무리 가벼워도 온전히 두 팔로만 힘없이 안긴 여자를 받친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음에도 서영은 거뜬히 해내며 도톰한 자신의 입술로 붉은 핏방울에 입을 맞췄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았던 그의 몸이 삽시간에 돌아오고 고통에 가득해 땀방울마저 흐르는 이마로는 매끄러운 살결이 유지되었다.'“꺅!”'아영이 지르는 비명에도 불구하고 서영은 그녀의 손바닥 엄지 아래 살두덩이에 입을 맞추며 천천히 혀를 굴렸다.'아찔한 향기에 서영의 굳은 몸이 풀렸다. 목구멍을 타고 조금 흘러 온 몸 구석구석으로 퍼지는 쾌락과 가까운 감동은 목마른 그를 좀 더 부추겼고 선홍빛 혀가 보여주는 미끄럽고 이질적인 감촉에 여자는 기겁하며 몸을 뒤흔들었다. '“사람 살려! 변태야! 살려주…….”'서영의 입술이 손바닥을 지나 거칠게 그녀의 입술을 가져간 것도 그때였다. 차가운 바람에 갈라진 입술의 주름 사이로 손바닥에서 흐른 것보다 더욱 따뜻하고 달큰한 향기가 흘러 도저히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아랫입술을 잘근 물어 혀로 그 주름 사이를 쓸자 여자의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혼이 빠질 정도로 놀라 굳어버린 그녀의 몸을 제대로 받쳐 올린 서영은 천천히 그 달디단 입술과 핏물에 매혹되었다.'그 순간 그는 그녀에게 종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