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X. 4. 22. '음, 무슨 말부터 써야 할지 모르겠다. 가슴이 두근두근거려서 막 기절할 것만 같다. '오늘은 나의 신혼 첫 번째 날. 하루를 너무 정신없이 보내고 인제 틈이 났다. 지형 씨가 씻으러 간 사이 깨끗한 이 일기장에 첫 글을 쓰는 참이다. (근데 이 일기장 내가 골랐지만 참 예쁘고 맘에 든다. 겉도 분홍색이고 안의 속지도 매끈매끈한 데다 예쁜 인형 캐릭터들이 가득~ ^^)'사실은 오늘이 첫 번째 날은 아니고, 경주로 신혼여행을 갔던 사흘 전이 신혼 첫 번째 날이긴 하지만 그때는 지형 씨가 너무 바빠서 거의 같이 지내지를 못했으니까. 그런 건 신혼여행이라고 부를 수가 없지 않나? '솔직히 지형 씨한테 말은 못 했지만 그 여행에는 나도 조금 불만이 있다. 처음 가본 무궁화 다섯 개의 특급 호텔은 멋있었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었지만 신랑이 옆에 없었으니까. 직장 때문에 바빠서 그런 건 할 수 없긴 한데 우리는 첫날밤-_-;;도 못 치렀으니까. 안 그런 척했지만 서운했는데……. 이런 말 하면 지형 씨는 더 서운하려나? '그러고 보면 오늘도 혼자서 바쁘긴 했다. 새집에서 처음 보내는 하루였으니까. 방방마다 돌아보며 내가 처음 가져보는 침대(둘이서 같이 쓰는 거긴 하지만. 근데 음음, 좀 부끄럽다. 이 침대에서 계속 지형 씨와 같이 잔다니. 으으……;;)나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붙박이장, 장식장, 소파, 탁자, 식탁(아일랜드식 식탁이라나 뭐라나, 하여간 그런 높은 식탁이 하나 더 있음), 의자, 대형 양문형 냉장고, 김치냉장고……(헥헥헥, 숨차다;;) 벽걸이 TV, 벽걸이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형인 평면 TV(이건 우리 방에 있다), 내 평생 내가 맘대로 만질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홈시어터 세트, 설명서를 봐도 도저히 이해 못 할 엄청난 용량과 기능을 가졌다는 컴퓨터, 22인치 모니터, 5단짜리 책장들, 그 책장에 가득한 책들, 피아노……(생각해보니 머리아프다. 내가 살 집에 이렇게 많은 물건이 있다니!) 그 외에도 기타 등등 기타 등등들을 보며 황홀…… 음, 황홀해서……'젠장, 황홀해하기만 했다면 얼마나 좋았겠어! =_=;;'그 많은 가구들 죄다 물걸레로 닦고 또다시 마른 걸레로 닦고 그릇들(그릇도 얼마나 많은지 일단은 우리 둘이 먹을 그릇 몇 개만 씻었다.) 꺼내 설거지하고 외숙모님께서 마련해주신 반찬통 다 새로 정리해서 담고 그러느라 죽을 뻔했다! '깨끗해 뵈긴 하지만 목욕탕 두 개도 대충 청소하고, 내가 해온 이불 말고는 침대 시트 같은 것도 다 한 번씩 빨아야 하는데 그건 언제 빨래하나. 일단 있는 시트랑 여분의 것 하나는 세탁기에 돌려서 건조해 다시 씌워놨다. 아우. 집도 크니 힘도 많이 든다. 과연 이런 게 상류층의 고통인지 내 이제야 알겠다.(라고 하면서 킬킬킬 웃는 나.^^; 사실 내 살림이라 생각하니 좋아서 입이 좀 벌어지긴 했다. 뭐니뭐니해도 ‘내 집’인걸.)'……근데 솔직히, 좀 부담된다. 지형 씨가 그럴 필요 없다고 말했었지만 이 큰 집이며 가구며 다 우리가 일해서 갚아야 하는 거 아닌가 말이다. 아무리 외숙부님 댁이 부자고, 회사 사장님이시라지만 지형 씨는 그냥 그 회사에서 일하는 월급쟁이(;;)일 뿐인데. 열심히 일하면 나중에 작은 사업체 하나는 차려주실지 모른다고 지형 씨가 웃으며 농담을 하긴 했지만, 어쨌든 그 집도 자식들이 있고 그러니까 지형 씨가 그만큼 인정받고 하려면(지금도 물론 인정은 받고 있는 모양이지만) 얼마나 더 뼛골이 빠지게 일해야 하겠냐고. T^T'남들은 잘 먹고 잘사는 게 중요하다고 하지만, 음, 난 그냥 부부끼리 화목하고 애들 잘 낳고 길러서(아직 낳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이런 생각을 하려니 부끄부끄. -//-;;) 서로 아끼면서 적당히 먹고 사는 게 더 좋다. 물론 자식들에게 기본도 못 해줄 정도는 아니어야 하겠지만 지형 씨 성격으로 보면 절대 그럴 리는 없을 것 같고. (처음부터 인상이 좋긴 했지만, 지형 씨를 겪어볼수록 내가 남자 하나는 잘 만났지 싶다. 으헤헷!) '아무튼, 오늘 하루 너무 바쁘게 아파트 안을 돌아다녔더니 삭신이 쑤신다. 점심도 신랑 없으니까 짱깨 한 그릇 시켜먹고 그만뒀다. 하기야 자장면이 어디야? 결혼하기 전에는 바쁠 땐 무조건 라면 고! 였는데. 게다가 오늘은 간짜장 먹었단 말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