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994년 5월 부산.'새벽 5시라는 이른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부산 광안리에 있는 24시간 국밥집은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현진은 입술을 잘근 잘근 씹으며 국밥집을 항해 걸어갔다. 기가 잔뜩 죽은 네 명의 남자가 그 뒤를 졸졸 쫓아갔다. '커다란 국자를 들고 항아리에서 깍두기를 푸던 국밥집 할매는 다가오는 5명의 낯익은 손님을 보자 잠시 바쁜 손을 거뒀다. 그녀는 친절하고 푸근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어서 온나. 오랜만이네.”'“안녕하세요 할머니.”'언제 들어도 사근사근한 현진의 서울말에 국밥집 할매는 방긋 웃었다. '“왠일이고? 느그들이 이리 꼭두새벽에 다 오고. 늘 밤에 오더만. 뭔 일 있나?” '“그렇게 됐어요. 지금 식사 되죠, 할머니?” '“하모. 드가라.” '현진이 팔짱을 끼고 입구에 서서 고갯짓을 했다. 뒤따라오던 재형, 승우, 창호, 성호는 그녀의 눈치를 슬슬 살피며 가게 안으로 쪼르르 들어갔다. 그들의 몸에서 술 냄새가 풀풀 풍겼다. 30년 국밥집 경력으로도 당해내기 힘들만큼 엄청난 악취였다. 국밥집 할매는 코를 쥐고 손을 흔들었다. '“아이구, 냄새야. 술독에 빠졌다 나왔나? 뭔 술을 이리 마신기고?”'이제는 ‘술’의 ‘ㅅ’만 나와도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현진은 이를 갈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국밥집 할매는 그녀의 기색과 네 남자의 뒷모습을 번갈아 살폈다. 왠지 심상치 않아보였다.'“무슨 일 있나?” '“쟤들이 사고를 쳐서요.” '국밥집 할매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사고? 또 무신 사고? 이번엔 뭐꼬?” '“그게요 할머니…….”'하소연을 하려던 현진은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리 단골집이라고는 하지만, 꼭두새벽부터 친구들의 험담을 남에게 늘어놓을 순 없었다. 더구나 사고가 보통 사고인가. 그녀가 입을 단단히 채우자 국밥집 할매는 피시식 웃었다. 달리 국밥집 30년 경력이 아니었다. '“술 퍼마시고 또 꼬장 부린기가?”'‘꼬장도 보통 꼬장이 아니예요’ 라는 아우성이 튀어나왔지만, 현진은 그 말을 꿀꺽 삼켰다. 반달형 눈에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는 그녀가 너무 귀여워보였다. 국밥집 할매는 잘 삭은 깍두기국물이 뚝뚝 떨어지는 국자로 입을 가리며 쿡쿡 웃었다. '“니가 이쁘게 좀 봐주라. 원래 남자들이 어리다 아이가. 어리니 피도 뜨거븐기고, 피가 뜨거버가 길 가다가 사고도 잘 치고 술 마시고 꼬장도 된통 부리고 그러는기다.”'“피 두 번만 뜨거웠다간 사람 잡겠어요.”'현진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국밥집 할매는 혀를 끌끌 찼다. '“이번엔 대체 무신 사고를 우찌 쳤길래 천상 생글생글 웃던 아가 이리 화를 내는기고? 암튼 들어온나. 내 국밥 팔팔 끓이주꾸마. 묵고, 기운 내가, 쥑이든가 살리든가 해라.”'그녀가 깍두기가 담긴 커다란 스테인레스 통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현진은 입구에 서서 숨을 크게 들이켰다. 짭짤한 바다 냄새가 코를 찔렀다. '현진은 어깨까지 내려오는 생머리를 야무지게 뒤로 모았다. 잔 머리카락이 하나도 남지 않을 만큼 바싹 모은 덕에 모근이 당겨오고 눈가마저 당겨왔다. 그러나 그녀는 몇 번이고 손바닥으로 머리카락을 모으고 모았다. 마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삐져나오면 하늘이 뒤집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현진은 청바지 주머니에서 고무줄을 꺼내 잘 다듬어져 하나로 모인 머리카락을 꽁꽁 묶었다. 너무 세게 묶은 탓에 머리카락이 뽑혀져 나가는 느낌이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웬수떼기들’의 성질과 술버릇을 박멸하고 말리라. 오늘은 기필코 뿌리를 뽑고 말리라! 반달형 눈에 결연한 의지가 감돌았다. 그녀는 입술에 단단히 힘을 줬다. 도톰한 입술이 입모양을 따라 일자로 길게 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