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기운이 소복하게 내려앉은 청월궁(靑月宮) 뜰 앞에 하염없이 꽃비가 내리고 있었다. 무겁게 내려앉은 잿빛의 대기, 수명을 다 한 채 어지럽게 흩날리는 꽃비 사이로 갓 태어난 생명의 비릿한 냄새가 뒤섞여 들었다. '응아. 응아!'회색빛 대기를 풀어헤치듯 갓 태어난 생명의 첫울음소리는 우렁찼다. '“마마님! 왕자님이십니다요.”'“참으로 감축 드리옵니다! 연비 마마!”'산파와 시중을 들던 시녀들이 일제히 입을 모아 외치고 들었다. 연비(蓮妃)는 천정에 매달린 면포를 붙들고 있던 양 손을 맥없이 늘어뜨렸다. 하얗게 질린 그녀의 얼굴은 마치 생명의 기운이 다해 떨어지는 뜰 앞의 꽃잎과도 같았다. 그 표정에서 산고가 얼마나 지독했는지가 묻어나왔다.'파리한 얼굴로 연비는 강보에 쌓인 핏덩이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러나 초점 없이 퀭한 그 눈동자엔 아무런 움직임이 들어있지 않았다. 산고 끝에 얻은 어미로서의 가슴 벅찬 감격과 모정 따위는 그 눈 속에 녹아 있지 않았다. 오직 텅 빈, 공허함만이 물결쳐 흐를 뿐이었다.'“마마, 참으로 잘생긴 아기님이십니다. 한번 보시옵소서!”'감격에 찬 산파가 아이를 안고 연비의 곁으로 다가가 떠들었다. 그러나 산모는 핏기 없는 얼굴로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냉하게 소리쳤다.'“하, 저리 치워라!”'“마, 마마?”'벌써 수많은 왕손들을 직접 손으로 받아낸 바 있던 늙은 산파는 뜻하지도 않은 산모의 태도에 자신도 모르게 아이를 안고 있던 어깨를 움찔, 떨고 말았다. '‘하아. 너는, 너는…….’'연비(蓮妃)는 격정에 헐떡거리며 싸늘한 눈길로 강보에 쌓인 핏덩이를 노려보았다. 그런 그녀의 눈동자는 무의미하다 못해 깊은 증오가 깔려 있었다. 도무지 어미의 눈빛이라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응아. 응아!'어미의 쌀쌀맞은 마음을 아이도 느낀 건지 그때까지도 아이는 첫울음소리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듣기 싫은 듯 연비는 잔뜩 찡그린 얼굴을 한 채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고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어댔다. '학, 학. 감정이 사무친 연비는 격하게 어깨를 들썩거리며 앉았다. 그녀는 산고로 까칠하니 하얗게 메마른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가슴이 뭉텅 잘려나가 버린 듯 밀려드는 텅 빈 상실감을 견딜 수가 없었다. '결코 원하지 않았던 무한국(無限國) 왕의 후궁 자리였다. 단 한 번도 원한 바 없던 왕과의 정사에서 태어난 그 씨앗이 결코 감동일 리 없었다. 그렇게, 연비는 용종을 생산하고도 환희는커녕 왕의 분신을 낳았다는 생각에 오히려 모진 마음만 들었다. 그래도 절반은 자신의 핏줄이건만 그런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아이의 존재에 더욱 강무왕에 대한 원망스런 마음만 사무쳐올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