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보기연풍 2권 (완결)

' 제 10 장'''''
' 윤은 우두커니 거대한 대문의 지붕을 쳐다보았다. 육중한 문은 둔중함 대신 날개를 한껏 펼쳐 비상하려는 새처럼 경쾌하고도 날렵한 모습이어서 이 하나만으로도 장인의 뛰어난 솜씨를 엿볼 수 있기에는 충분했다.'' “전하. 이쪽입니다.”'' 앞 장서 나가던 하인이 그를 재촉했다. 마치 윤은 자신이 이곳을 방문했다는 것을 감추고자 하는 하인의 행동에 절로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 백리세가는 과연 사방의 재화(財貨)가 모두 응집된 곳이라는 풍문을 증명하듯 웅장하고 화려한 맛을 지녔다. 고풍스럽고도 수려한 느낌을 주는 아홉 개의 지붕마루로 이루어진 팔작지붕들이 일렬로 서 있어 그 장대한 기풍을 밖으로 드러내 주었고 기둥들마다 단사(丹砂:붉은 염료)가 칠해져 있었다. 또, 화려한 색감을 자랑하는 채화(彩畵)들이 각각의 건물들의 기둥, 도리, 천장 등에 서로의 자태를 뽐내듯 단장되어 있었다. '' 윤은 건물 전체를 감싸 연결한 장랑(長廊)을 유람하듯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다급해진 하인이 힐끔거리며 뒤를 돌아보았지만 윤은 못 본 체 했다.'' “정말 굉장하군.”'' 자신이 찾아온 목적을 잠시 잊을 정도로 회랑의 숱한 보위에 그려진 채화들은 뛰어났다. 길을 지나갈수록 갖가지 산수풍경과 신화와 고사(古史)가 이어지며 눈을 즐겁게 했다. '' “이곳입니다.”'' 하인이 안내한 곳은 누각이었다. 윤은 잠시 위를 올려다보았다. '' “위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았다.”'' 윤은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이왕 온 길, 이제 와서 되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심을 다진 그가 위로 오르자 이미 기다리고 있었던 듯 백리유향이 간단한 음식과 술을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시지요. 기다리고 있었사옵니다.”'' 윤은 못미더워하며 그녀가 내미는 자리에 슬쩍 걸터앉았다. 그런 그의 행동을 바라보던 백리유향의 입가에 살포시 미소가 떠올랐다.'' “무언가 불편하신가요?”'' “아니오.”'' 아직 서로의 본심을 알 수 없는 두 사람은 정중히 거리를 두며 서로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사락거리며 산들바람이 지나치자 누각에 걸쳐 놓은 엷은 비단 휘장들이 환상적인 움직임을 보이며 찰랑거렸다. '' “전 이곳을 좋아해요. 이곳이야말로 아호(雅湖)의 풍광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장소니까요.”'' “아름다운 곳이군.”'' “그렇지요. 백리세가는 아호를 둘러싸고 지어진 건축물들이라 다른 곳과 비할 수조차 없어요.”'' 가문에 대한 뿌듯한 자부심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윤은 가만히 그런 그녀의 옆모습을 지켜보았다.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과 붉은 입술이 기묘한 조화를 이루며 시선을 잡아끌었다. '' “유향, 그대는 대단한 여인이야. 수많은 세가 사람들을 손가락 하나로 부리니 말이지.”'' 순수한 감탄을 담은 윤의 말에 화답하며 백리유향이 미소를 지었다. 천하제일미인답게 해사한 미소는 확실히 돌부처라도 돌아앉을 만큼 눈부셨다. 그러나 윤은 그녀의 화려한 겉모습에 속지 않았다. 세간에는 그녀의 미모만이 알려져 있었으나 실제 그녀는 거대한 백리세가를 움직이는 중추였던 것이다.'' “과한 칭찬이시군요. 전하께 듣자니 더욱 더 귀한 말이겠지요. 그나저나 이런 입에 발린 칭찬을 위해 방문하신 것은 아니실 테고…… 중대한 일이겠지요?”'' 눈치 빠른 그녀답다는 생각을 하며 윤은 그녀가 권하는 술잔을 받아 들었다. 그윽한 국화 향이 콧속을 파고들었다.'' “맞아. 아주 중대한 일이 있지.”'' “내 제의에 대한 답인가요?”''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 또 다른 일인가요?”'' “물론 그대가 개입되어 있는 일이지. 그것도 아주 깊숙이 말이야.”'' 백리유향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움직이자 머리 위에 꽂힌 나비 모양의 머리꽂이가 날아갈 듯 팔락거렸다.'' “깊숙이?”'' 작게 중얼거리는 백리유향을 담담히 보고 있던 윤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 “이게 뭐죠? 새의 깃털인가요?”'' “뛰어난 재녀(才女)로 소문난 당신이 이것을 모른다니 보고도 믿지 못할 일이로군.”'' 명백한 비웃음에 백리유향의 입가에 머무르던 미소가 싹 사라졌다. 윤은 차갑게 반들거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와 수수께끼 놀음을 하자는 건가요?”'' “두 말 할 필요 없어. 당신이 그랬다는 것을 다 알고 있으니까.”'' “내가 뭘 했다는 거죠? 도통 알 수 없는 소리만 하는군요.”'' 윤은 강하게 반발하는 백리유향의 얼굴을 한참동안 바라보더니 돌연 씩 웃었다. '' “발뺌해도 이미 늦었어, 유향. 이미 내게는 당신이 했다는 증거가 있으니까. 규연각의 시비가 남긴 유서가 내게 있거든.”'' 태연자약하던 백리유향의 얼굴에 긴장된 표정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그의 말이 끝나면서부터였다.'' “나는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그대가 황후에게 짐독(鴆毒)을 제공했겠지. 그리고 황후는 자신이 배후인 것을 두려워해서 여차하면 규연각의 시비에게 덮어씌울 요량으로 백리세가에 그 시비를 보내 독을 얻어 왔을 것이야. 안 그런가?”'' 맑고도 검은 눈동자가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윤은 차분히 그녀의 답변을 기다렸다.'' “근거 없는 추측만으로 날 모함하지 말아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시비가 유서를 남겼다는 것 역시 믿을 수가 없어요. 만약 전하 말대로 누군가 그런 일을 벌인 거라면 시비가 남긴 유서를 가만 두었을 리 없죠. 그러니 억지 부리지 마세요. 아무리 담왕 전하라 해도 날 건드릴 수는 없어요.”'' 윤은 조리 있는 그녀의 설명을 듣고도 전혀 태도에 변화가 없었다.'' “물론 당신 말이 맞아. 하지만 시비가 죽고 없기 때문에 그들은 입을 막은 거라고 생각한 거겠지. 더구나 그들의 계획에는 내가 개입될 거란 예측은 없었어. 방심할 만도 해.”'' “그래서요?”'' 백리유향이 윤의 답변에 도전적인 시선을 던졌다.'' “착각하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난 백리세가와 등을 돌리자는 것이 아니야. 다만, 스스로 만든 매듭을 스스로 풀어 주었으면 하는 요청을 가져 왔을 뿐이지.”'' 백리유향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윤은 그녀의 생각이 몹시도 궁금했지만 기다리기로 했다. 잠시 후 굳어졌던 백리유향에 입가에 다시금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군요. 매우 궁금해요. 어찌하여 상왕의 여자를 살리려고 그리 애쓰는 거죠? 상왕이 이대로 무너진다면 황태자의 보위는 전하의 것이 될 터인데.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굴러 떨어질 자리를 왜 마다하는 걸까요? 단지 형제간의 정리(情理) 때문에?”'' 윤은 슬쩍 화제를 돌려 먼저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는 그녀의 계교를 눈치 채고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역시 백리유향은 손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답변 여부에 따라 일이 해결되느냐 안 되느냐의 중대한 문제가 걸려 있었다.'' “답하지 않는다면?”'' “저 역시 전하의 질문에 답할 필요가 없어지지요.”'' “답한다면?”'' “진실을 말해준다면 저 역시 생각해 보죠.”'' “생각만 가지고는 모자라. 그대 역시 진실을 말해 준다는 약조를 해 준다면 고려해 보지.”'' 백리유향은 진지한 윤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이윽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리 하지요.”'' 백리유향이 허락하자 일단 윤은 숨을 골랐다. 가슴 속 깊이 숨겨진 비밀을 남에게 드러내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대로 손 한 번 쓰지 못하고 연모하는 여자가 죽게 놓아둘 수는 없어. 그것이 내가 발 벗고 나선 진정한 이유랄 수 있지.”'' 그의 고백에 백리 유향의 동공이 크게 열리며 커다란 눈동자 속에 경악과 불신이 한군데로 모여들었다.''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난 그것이 그저 떠도는 풍문으로 여겼거늘, 진실일 줄이야.”'' “그래.”'' “그 여자의 어떤 점이 그리 매혹적이던가요?”'' 뜻밖의 질문에 윤이 백리유향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왠지 어둡고 비참해 보였다. 그는 백리유향의 그런 모습은 처음 보았다. 항상 오만할 정도로 자신만만하게 빛이 나던 그녀에게 처연함이란 어울리지 않았다.'' “그것까지 대답해야 하나?”''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저 궁금해서죠. 얼마나 성의 있는 대답을 듣느냐에 따라 저 역시 정성껏 답변을 할 것이니까요.”'' 윤의 눈이 아련하게 흐려졌다. 그는 저 멀리 희뿌연 안개 속에 가려진 아호의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내 삶의 지표야. 그녀로 인해 난 내 갈 길을 찾은 셈이니까.”'' 실로 많은 뜻이 응축되어 있는 말이었다. 백리유향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윤의 눈길이 닿아 있는 아호를 바라보았다.'' “그 여자가 부럽군요.”'' 너무나도 작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을 수 없을 정도의 웅얼거림에 불과했으나 윤은 그것을 똑똑히 들었기에 백리유향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녀는 윤을 바라보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서서 난간에 기댔다.'' “좋아요, 말하죠. 전하의 말이 맞아요. 내가 황후께 짐독을 제공했어요.”'' 그 순간 윤은 이름모를 감정으로 인해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의 추측이 맞아 떨어졌다는 안도감도, 치명적인 짐독에 대한 절망감도 아니었다. '' “……왜지?”'' 쥐어짜듯 억지로 내뱉는 윤의 목소리에 백리유향의 얼굴에 희미한 여운이 잔향처럼 머물렀다 사라졌다.''

미리보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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