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동 딩동.’'“누구세요.”'“나야. 아휴 오늘은 왜 이렇게 덥냐? 빨리 문 좀 열어 줘.”'인혜가 문을 열자 늦더위에 지친 서진이 커다란 수박을 들고 들어왔다.'“거기 좀 앉아. 시원한 냉수 줄까?”'“그래 냉수부터 주라.”'인혜가 냉수를 준비하는 동안에도 서진은 손부채를 연신 흔들며 투덜거렸다.'“이제 여름도 다 갔는데 무슨 날씨가 이렇게 더운지 모르겠다.”'얼음을 몇 조각 넣어 담은 유리컵에 송글송글 맺힌 이슬이 보기만 해도 시원해질 것 같은 냉수를 내밀며 뜻밖이라는 듯 인혜가 말했다.'“근데 무슨 일이야? 마감은 며칠 남았잖아. 난 다음 주에나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출판사에 일정에 차질이라도 생겼어? 갑자기 당겨지면 낭팬데. 요즘 너무 더워서 조금 게으름을 폈더니 생각보다 진도가 덜 나가서 채색 작업이 마무리가 아직 덜 됐거든.”'인혜가 건네준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켠 서진이 입가를 닦으며 손을 내저었다.'“아니야. 아니야. 그러니까 걱정 마셔. 얘는 내가 무슨 빚쟁이 같다 얘. 마감 날 아니면 뭐 난 네 얼굴도 못 보러 오니? 마침 근처에 최 작가님 댁에 들렀다가 은영이가 좋아하는 수박을 보니까 갑자기 은영이도 보고 싶고 날도 더운데 혼자 작업하는 우리 인혜 씨도 보고 싶어서 이렇게 왔지. 나 예쁘지? 수박도 이따 만한 거 사왔지롱.”'인혜가 살아온 녹녹치 않은 인생의 굴곡을 모두 알고 있는 서진은 인혜 앞에만 서면 늘 애교가 철철 넘쳤다. 안 그러면 늘 무표정인 인혜 얼굴에 웃음 한번 스치기가 어렵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사실 서진과 인혜는 대학생이 된 후에 만났기 때문에 알아온 세월로 따지면 십 년쯤 되었을 것이다.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혼자 공부하러 상경한 인혜에겐 워낙 아는 사람이 없었고 서진도 고아로 자라 외롭던 시절이었기에 친자매 이상으로 친하게 지내며 서로를 다독거려 온 두 사람이었다. 인혜의 하나뿐인 사랑 또 그 사랑의 아픈 결말과 혼자 그 아픔을 삭이며 은영을 키워 온 세월 그 모두를 알고 있는 단 한 사람 서진은 인혜에겐 딸 은영이 다음으로 소중한 가족인 것이다.'“수박 진짜 크지? 냉장고에 들어 있는 시원한 걸로 사 왔으니까 어서 잘라서 내와 봐. 얼마나 단지 먹어 보자.”'“그래 정말 크기도 하네. 이 더운데 들고 오느라고 얼마나 힘들었어. 은영이도 무지 좋아하겠다. 아 참! 은영이 유치원에서 올 시간이네. 얼른 잘라 줄 테니까 먼저 먹고 있어.”'바로 앞인데도 마음이 급해서 뛰어가니 은영이는 벌써 유치원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엄마를 향해 달려오는 은영이를 보니 새삼스럽게 벅차오르는 사랑에 인혜의 두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에구구 우리 공주님 오늘도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왔어요?”'“네 엄마. 저 오늘 그림 잘 그린다고 선생님한테 칭찬 받았어요.”'“아유 예뻐라. 우리 은영이 참 기분 좋았겠네. 근데 더 좋은 소식 있다. 지금 집에 누가 와 있는지 알아맞혀 봐.”'작은 얼굴에 궁금한 표정이 어리며 곰곰이 생각하던 은영이 대답했다.'“옆집 송이가 놀러 왔어?”'“아니 송이보다 더 반가운 서진이 이모 왔지요.”'“야 신난다. 빨리 가요 엄마.”'뜨거운 햇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푸르른 신록이 눈부신 늦은 여름의 어느 날 두 모녀는 그렇게 행복해 보였다. 그러나 맞은편 귀퉁이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는 한 남자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차갑게 굳어 있었다. 눈동자에 어린 일렁이는 아픔과는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은영이가 서진에게 달려들었다.'“이모. 은영이 왔어요. 이모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요. 어! 와 수박이다.”'은영이는 썰어 놓은 수박을 보자 안 그래도 큰 눈이 더욱 커졌다.'“어쩐지 요 녀석 이모보다 수박이 더 반가운 것 같은데?”'“그러게. 은영아 손은 씻고 먹어야지. 어서, 그리고 천천히 먹어.”'“네.”'대답을 마친 은영이 화장실로 들어가자 서진은 인혜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슬쩍 물었다.'“은영이 요즘은 아빠 이야기 안 물어봐?”'“내가 힘들어 하는 걸 아는 건지 요 근래에는 안 물어보네.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파. 옆집 송이네도 이젠 자주 안 가려고 해. 송이 아빠가 있어서 어색한가 봐.”'“이런 말하려고 온 건 아니지만 넌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차 선배 인도에서 아주 들어왔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