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덜렁대는 것에 지수를 따를 자 없었다. 토요일 모처럼의 늦잠을 자는 날이었다. 철민이 출근하지 않는 날이기도 했다. 오후에는 아이를 봐 줘야 하는 경우는 왕왕 생겼으나, 오전 대부분은 그가 아이를 건사했다. 그 사이 지수는 일주일치 밀린 늦잠 분량을 채우면 되었다. 그러니 아무 생각 없이 오늘도 꿈과 현실을 비몽사몽 넘나드는데.'“아줌마, 일어나. 손님 왔어.”'여느 날과 달리 효민이 들어와 깨웠다.'“오 분 만.”'아주 잠깐 요일을 망각하고 칭얼거렸다.'“일어나아! 손님 왔다고오.”'효민이 잔뜩 부은 목소리로 버럭 성질을 냈다.'“효민아, 아줌마 오 분만 더 자면 안 될까?”'한쪽 눈만 겨우 뜨고 아이를 보니 입이 한발이나 나와 부르텄다.'“손님 왔다니까.”'“응?”'“손니임!”'벌컥 부아를 내고는 팩 등을 돌려 나가버렸다.'“손님?”'멍한 머리로 뇌까려보지만, 이 집으로 그녀를 찾아 올 손님이 있을 턱이 없었다. 부스스하게 완전히 잠을 떨치지 못한 채 앉아 있다가.'“아!”'지수는 저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자신의 이마를 철썩 때렸다.'“아이 씨, 아퍼라…….”'어찌나 세게 때렸던지 일시에 잠이 확 달아났다. 물론 태하를 떠올리는 순간부터 붙어 있지도 않았지만 말이다.'“지금 몇 시지?”'따끔거리는 이마를 부리나케 비비며 황망히 휘휘 고개를 돌리다가 자명종을 보고는.'“우악! 여, 열한 시! 어쩌지? 이 일을 어쩌지?”'벌떡 일어나 이리저리 왔다갔다 허둥댔다.'“아, 씨이.”'그리고는 털썩 침대에 주저앉아 자신의 머리를 꽁꽁 쥐어박으며 건망증을 탓했다. 태하와의 약속은 열시 반이었다. 그의 집에 정오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다. 만나서 이리저리 입을 맞추고, 단단히 중무장하여 들어가기로 철썩 같이 약속을 해 놓고 잊어버린 것이다.'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지만 이 정도면 치매에 가까웠다. 무엇보다도, 그전에 쇼핑을 나가 입을 만한 투피스를 사야 한다는 사실을 노란 포스트잇에다 벌겋게 휘갈겨 거울에다 철썩 붙여 놓고서도, 그 포스트잇 존재 자체를 잊어버린 거다.'아무리 서로의 사정을 봐주는 일이라지만, 첫 인사에 청바지는 아니 될 말이었다. '이도저도 못하고 끙끙거리다가, 겨우 얼굴을 내밀 용기를 긁어모았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이 방에 콕 박혀 숨어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저, 저기…….”'겨우 양치와 세수만 하고 큰 거실로 나오니 세 쌍의 눈이 그녀에게 들러붙었다. 한 쌍은 무표정, 한 쌍은 분화구, 또 다른 한 쌍은 웃고 있었다.'“미인은 잠꾸러기?”'태하가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하고 실없이 굴었다.'“에헤헤헤. 그게요…….”'잊었다고, 다음으로 연기하면 안 되겠냐고 말하려다가 철민과 눈이 딱 마주쳤다.'‘히힉! 이 집에 남자를 끌어들이지 말라고 했는데…….’'침을 꿀꺽 삼키며 그의 눈치를 살피는 지수였다.'“얼른 준비하세요.”'이미 준비가 끝난 상태가 바로 이 모습이라 말하지도 못하겠다. “저기 태하 씨. 제가 옷이 그러니까…….”'끙끙 앓다가, 지수는 난처한 기색으로 머뭇거렸다.'“아, 지금 준비 다 하신 건가요?”'역시 눈치하나는 빠르다.'“그니까요.”'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지금 상태로 인사를 드리기가 좀 곤란하죠, 아마?”'그러다가 너무 안도하는 것이 역력한 모습이 찔려 지수는 검지로 자신을 훑어 내리며 난감해 하는 척 했다. 어리둥절해 하던 태하의 눈이 웃는다.'‘그나저나 저 사람은 화를 낼 줄도 알까?’'그의 안색을 살피며 자못 궁금해지는 지수였다. 반면, 철민은 호탕하게 웃을 수는 있기는 할까 궁금해지기도 했고.'“괜찮아요.”'태하가 서둘러 일어나며 말했다.'“들어가기 전에 백화점부터 들르죠.”'“예? 아…… 예에.”'괜히 김칫국을 들이켰나 보다.'“아줌마 인사하러 어디가?”'실망하는 기색을 억지로 누르는데 효민이 실눈을 뜨고 물었다. 볼이 퉁퉁 나온 것으로 보아 좀 화가 난 듯도 하다.'“응?”'“인사는 여기서 하면 되지. 어디 가냐고.”'“아, 그게…….”'설명하기 곤란했다. 아이에게 지금 이태하라는 아저씨와 공모해서 어른들을 속이기로 했다. 하고 말하는 것이 교육상 가히 좋을 것 같지도 않았다. 답을 못하고 얼버무리는데.'“선배님, 오늘은 시간이 여의치 않습니다. 다음에 다시 인사를 드리겠습니다.”'철민에게 태하가 깍듯하게 선배대접을 하는 거다. 철민이 꿍꿍이가 있을 법한 눈으로 음, 고개만 끄덕였다.'“그만 나가죠.”'태하가 그녀의 팔꿈치를 잡았다.'“늦지 않았을까요?”'철민에게 시선을 두었다가 고개를 외로 꼬고는 태하를 올려다보았다. 꼭…… 도살장으로 끌려들어가는 기분이 이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