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이 칩거하고 있는 산사에 들러 새로 품종개량을 한 허브차를 가져다주고 돌아오는 선진은 아주 피곤한 상태였다. 지난밤에 느닷없이 걸려온 보령으로부터의 전화 때문에 근심하며 잠을 이루지 못한 탓이다. 가뜩이나 오늘 낮에는 허브와 커피의 배합비율에 대해 고민하느라 평소 잘 마시지도 않던 커피를 열 잔 가까이 마시기까지 했다. 몸은 피곤하고 눈은 따갑고 머리는 몽롱했다. '보령은 산사에서 얼마간 더 머물겠다고 했다. 등산 삼아 올라갔던 산사에 무슨 마음이 동해서 그렇게 집착하는 것일까? 산사만큼이나 공기도 좋고 물도 맑아서 생활하기에 그만인 농장에서의 생활을 극구 거부하는 그녀의 속을 선진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차편이 신통치 않으면 30분이 넘도록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 그 깊은 산골에 왜 처박혀 있으려는지 역시 알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당장에 머리를 박박 깎고 비구니가 되겠다고 선언하지 않은 게 다행일 지경이니 원. 어려서부터 아주 고집이 센 녀석이기는 했지만 가끔은 그 정도가 너무 심하다.'보령은 선진의 동생이다. 그를 낳은 이후로 어머니가 자궁적출수술을 받았던 터라, 진짜 배가 불러 낳지 않은, 가슴으로 낳은 딸이다.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물론이고 선진도 늘 그녀를 친피붙이같이 생각했다. 자라면서 보령은 자신이 입양아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알아챘지만 그것을 드러내어 화를 낸 적도, 가족들을 향해 울분을 토한 적도 없었다.'그들을 아우르고 있는 단어는 한번 맺으면 마음대로 걷어찰 수 없다고 생각하는 ‘가족’과 끈끈한‘사랑’이었다. 가족 중 누구도,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보령의 태생에 대해서 물고 늘어진 적이 없었고, 그런 일 자체를 화두로 올리는 일도 없었다. 그만큼 그녀는 어머니에게 금쪽같은 딸이었고, 그에게는 더없이 사랑스러운 동생이었다. 그런 그녀가 가족이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 혼자 살겠다고 한다, 그것도 남자 중들만 득시글거리는 산꼭대기 절에서. '“보령은 정말 속세를 떠날 생각인 건가?”'네거리 신호등 앞에서 멈춘 선진은 피곤한 눈 사이를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두통을 다스렸다. 동생에 대해서 생각하다 보면 늘 두통이 일었는데, 오늘은 커피 때문에 그 통증이 더 심하게 느껴졌다. 심장도 조금씩 두근거렸다. 빨리 돌아가서 쉬어야 할 것 같았다. '신호등의 초록불이 점등되자 선진은 엑셀을 밟아 빠르게 차를 출발시켰다. 다음 코너에서 바로 우회전을 해서 10분여만 더 가면 그가 운영하고 있는 대규모 허브 농장이 나온다. '단지 허브만 재배하는 것이 아니라 펜션과 레스토랑, 베이커리, 공방, 선물가게, 미니 동물원, 카페까지 두루 갖추어져 있는 꽤 규모가 있는 사업체였다. 하나하나 신경을 쓰자면 끝이 나지 않을 것처럼 일이 많았지만 다 팽개치고 쉬어도 될 만큼 적재적소에 직원들이 충분히 배치되어 있었다. 특히나 그가 자리를 비우면 대신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총책임자 도영과 규민도 듬직하게 버티고 있었다. 그러니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살아도 될 터였다. '“허엇!”'연이은 초록신호를 따라 죽 달려가던 선진은 코너를 돌자마자 무단횡단을 하고 있는 여자를 발견하고는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다행히 바짝 뒤따라오고 있는 차도 없었고, 선진이 브레이크를 여러 번 짧게 끊어 밟은 덕분에 차의 속도는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다행히 사고로 이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퍽!'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여자의 몸이 묵직하게 차에 부딪친 후 튕겨 나갔다.'“…….”'순간 서늘한 기운이 선진의 뒷골에서부터 앞이마까지 죽 타고 흘렀다. 속도를 완전히 늦추었다고 너무 방심을 했던 모양이다.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