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은 끊임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깼다. 베개에 머리를 묻은 채 얼굴만 삐죽 돌려 창문을 쳐다봤다. 캄캄했다. 아직 동 트려면 한참 멀었다는 말이다. 헌데 이 새벽에 전화를 했다면, 잘못 걸린 전화가 아닌 이상 무척 급한 일임에 틀림없다. 지난 늦봄에 막역지우였던 민 회장님이 돌아가신 뒤 할아버지께서 그 충격으로 한 번 쓰러지셨는데 혹시 또 쓰러지신 것은 아닐까? 불안함에 허덕이고 있는 사이 끊어졌던 벨 소리가 다시 울렸다.'이준은 벌떡 몸을 일으켜 머리맡에 놔둔 휴대폰을 들었다. '평창동. '액정에 떠 있는 발신자를 확인한 순간 이준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주위의 공기가 희박해지며 숨쉬기가 힘들었다. 급히 숨을 몰아쉬며 폴더를 열었다. '“여보세요?”'“이사님, 큰일 났어요. 회장님께서 쓰러지셔…….”'충주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준은 휴대폰을 닫고서 번개 같은 속도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스위치를 켜고서 옷장 문을 열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찾아 입고는 자동차 키를 챙겨 정신없이 오피스텔을 나갔다. 오피스텔에서 본가까지는 차로 10분 거리다. 그런데 오늘따라 그 짧은 거리가 지구 끝까지 달려가야 하는 것처럼 길고 지루하게 느껴졌다.'제발, 제발……. 평창동 본가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이준의 가슴은 걱정으로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덜덜 떨리는 마음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현관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섰다.'때마침 안방에서 나오던 할아버지의 주치의인 한 박사와 마주쳤다. 50대 후반으로 매사가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신 분이라 환자의 상태가 웬만큼 위험하지 않으면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으시다. 헌데 지금 한 박사의 표정은 눈에 띄게 침중했다. '이준은 오싹오싹한 한기가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박사님, 할아버지는 어떠세요? 아직 깨어나지 못하신 거예요?”'“다행히 회장님께서는 깨어나셨네. 흠…… 하지만 쉽게 기운을 차리지 못하실까 그게 걱정이네.”'“그게 무슨? 아, 아니 그보다 건강하셨던 할아버지께서 왜 갑자기 쓰러지신 거죠?”'“회장님께 무슨 큰 충격을 받으신 것이 아닌가 싶네. 연세가 지극하신 분들은 한번 충격을 받으면 예전처럼 건강을 회복하기가 힘든 법인데…….”'할아버지께서 영영 기운을 차리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말의 우회적인 표현이다. 이준은 철퇴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얼얼했다. '한 박사는 이준의 냉철한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리는 것을 보자 내심 흡족했다.'회장님께서 손자 하나는 정말 잘 키우셨어. 손자에 대한 자신감이 있으시니 이런 엄청난 연극을 꾸미신 거겠지.'“회장님의 심기가 불편하지 않으시게 자네가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할 걸세.”'한 박사는 걱정으로 안절부절 못하는 이준의 어깨를 툭툭 쳐주며 말했다.'너무 걱정 말라는 듯 위로의 뜻이 담긴 손길에 이준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네, 박사님. 수고하셨습니다.”'“수고는 무슨? 회장님께서 기다리시니 어서 들어가 보게.”'이준은 한 박사에게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대신 한 뒤 조심스럽게 안방 문을 열었다.'환자를 위해 스탠드만 켜져 있는 흐릿한 불빛 사이로 아랫목에 두툼하게 깔린 이부자리가 보였다. 할아버지께 걱정하는 모습을 보여드리지 않기 위해 이준은 속으로 길게 한숨을 쉬며 마음을 안정시켰다. 그리고는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시집오실 때 혼숫감으로 장만해오셨다던 자개장롱이 장승처럼 서 있는 방안으로 슬며시 발을 내디뎠다.